"수능이 싫어요. 태어나 12년 동안 배운 것을, 다 나오지도 않는 수능 하나에, 단 하루에 결정지어버린다는 건 좀 많이 짜증나는 일입니다."
"오늘은 몇 명이나 인생을 포기할까? 작년의 아픔이 또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외롭다."
(수능반대 '소망나무'에 걸린 엽서내용 가운데)
서울 신촌에 위치한 창천공원. 수능시험이 치러졌던 지난 17일 오후 6시, 뉘엿뉘엿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올해로 2회째를 맞은 '수능반대 페스티벌' 행사 주최측의 손놀림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청소년들이 공원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음악이 울려 퍼지자 길을 가던 어른들도 발걸음을 멈춘 채 목을 길게 늘이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경복여고 춤동아리 '스카이'의 공연이 시작되자 아이들도, 어른들도 무대 주변으로 모여들어 흥겨운 율동과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간혹 현란한 춤동작에는 여기저기서 박수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동아리의 리더를 맡고 있는 한 여학생은 공연이 끝난 뒤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우리는 춤을 추고 싶어요. 그래서 춤을 배우는데 '국영수'까지 잘 할 필요는 없잖아요? 더 이상 우리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마세요."
***"학생들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교육이 바로 선다"**
'수능반대 페스티벌'은 한 여학생의 죽음을 머금고 올해로 2회째를 맞게 됐다. 지난해 11월 문화제 형식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문화연대, 전교조, 학벌없는 사회, 청소년단체 '희망' 등 준비기획단은 뜻밖의 소식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한 여학생이 수능 1교시 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던 아파트 옥상에서 꽃다운 열아홉 청춘을 던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결국 문화제는 촛불 추모제로 바뀌어 진행됐다.
주최측은 올해 행사를 기획하면서도 내내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고 했다. 행사 기획에 참가한 한 교사는 "오늘처럼 하루가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인 듯 싶었다"는 말로 주최측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 교사는 "개념을 이해하기보다는 지식을 암기하기에 바쁘고, 체험하고 느끼고 창조하기보다는 가르쳐주는 대로 받아쓰기에 바쁜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라며 "그런 잘못된 교육방식을 획일적 대학입시에 맞춰 다시 평가하다 보니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까지 스스로 공부하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현직 교사이기도 한 이철호 '학벌없는 사회' 사무국장은 "지식교육 위주의 서열식 평가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됐지만 교육부는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기는커녕 도리어 대학별로 실시돼 온 고교등급제를 방관하고, 더욱 많은 문제를 양산하게 될 입시안을 오는 2008년부터 시행하겠다는 입장만을 반복하고 있다"며 "'잘 외운' 학생보다는 '수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는' 학생을 선발해 '키워주는' 대학이 돼야 비로소 우리 교육은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병영 장관님, 저희는 입시 때문에 몹시 아픕니다"**
교사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무대 한켠에 마련된 스크린에서는 청소년들이 직접 제작한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청소년들은 '절규'하고 있었다.
한 여고생은 자신에게 마치 심판처럼 내려진 내신등급을 보며 상상했다. 어른들이 자신들을 푸줏간에 걸린 고기덩이처럼 몸 여기저기에 마음대로 도장을 찍고 있다고. 여고생은 그런 현실이 싫어 자살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파트 옥상에서 쳐다본 하늘은 너무도 푸르렀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또다시 '언어영역' '사회탐구영역' 등 수능시험의 문제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계단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여고생은 하늘나라로 갔다.
홍상환(덕수정보산업고 1학년) 군은 영상물 상영 뒤 자발적으로 무대 위로 올라와 "교육의 한 주체인 학생들에게도 교육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홍 군은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교내에서 쓰레기줍기 봉사활동을 하는 것 밖에 없다"며 "학생들이 믿는 학생회, 더 이상 쓰레기만 줍지 않는 학생회를 만들어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결정짓는 대입제도를 꼭 바꾸고 싶다"고 했다.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한 청소년은 안병영 교육부장관 앞으로 보내는 엽서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저희 선배들이 수능시험을 치렀습니다. 얼마 뒤에는 저희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공부하기 싫어 가출까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배들처럼 저 또한 타의에 의해 제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지도 모릅니다. 대입제도를 바꿔주세요. 학교에서 '국영수'만이 아니라 '열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는 지금 몹시 아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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