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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기림의 "길", 그리고 권세자들의 어리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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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기림의 "길", 그리고 권세자들의 어리석음

김민웅의 세상읽기 <16>

시인 김기림이 쓴 <바다와 나비”>는 이렇게 시작되지요.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겉보기에는 얼핏 아름답기만 한 바다, 그 푸른 물결이 마치 청무우 밭이라고 여기고 나비는 그 위에 아무런 염려 없이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가 쏟아내는 현실의 거센 풍파를 아직 알 길이 없던 나비는 그러다가 그만 난데없는 파도에 휩쓸려, 혼비백산하여 돌아옵니다. 하여 그 다음 연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꿈을 품고 마주한 세상은 나비에게 가혹한 시련과 때로 좌절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만하면 희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쯤해서는 성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가 어그러지는 현실 앞에서 시인 김기림은 다음과 같이 슬퍼합니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봄은 왔지만 아직 시린 바다는 꽃을 피울 수 없다는, 아니 바다에서 꽃을 구한 나비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르는 서러운 심사를 그는 외로운 풍경화처럼 그려냅니다.

나비가 날아간 그 흔적 없는 공중의 길. 사람이 걸어가는 흙 위의 길. 그리고 역사가 발자취를 남기는 길. 거기서 우리는 꿈과 추억, 그리고 상처와 갈망을 무수히 만나게 됩니다.

김기림의 시, <길>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틋함과 손에 잡힐 듯 그러나 여전히 잡히지 않는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뿍 담아냅니다. 어머니, 그리고 이후 첫사랑. 모두 길 위에서 기약 없이 그의 인생으로부터 사라지고 맙니다. 은빛 바다와 노을에 젖은 강가. 그리로 가는 길 언덕, 그 기슭에 서있는 버드나무는 그에게 기다림의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어둠이 깔리면 어느새 그의 마음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으로 눈물이 속으로 깊어집니다.

“내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내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 둔덕과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늘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바다는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여읜 소년의 시절은 긴 언덕길을 돌아 떠난 상여와 함께 아득해졌고, 첫 사랑은 손에 쥐고 기뻐하는 조약돌인줄로 알았더니 어디선가 떨어뜨리고 맙니다. 그렇게 서 있으면 꼭 돌아올 것만 같아,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무작정으로 기다리는 그의 마음에 저녁하늘이 그림자처럼 스며듭니다.

이 힘겨운 시대를 살면서 서러운 이들의 눈망울에 이슬이 맺히고 있습니다. 삼월의 바다에는 꽃이 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꽃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간절한 까닭이지요. 또한 오늘도 길 위에 홀로 서서 이쯤하면 돌아오겠지, 하면서 그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파도는 제 힘만 믿고 성낼 줄만 알고, 이제는 이만하면 돌아와야 할 자들은 마을 밖 모래판에서 씨름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권세자들의 어리석음이 정녕 안타깝습니다. 세월의 내면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의 비극이라고나 할까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진정 아니 오면, 그 땐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으로 하여 더 이상 마음 아파하지 않고 싶어서도 말입니다. 일단 떠난 다음에는 소용없는 걸. 어제까지는 그래도 참으려 했는데 하면, 어찌하려고 그러는지. 조약돌처럼 집어 들었다가 그만 놓쳐버린 첫사랑이 되지 않는 것이 좋은 텐데 말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에서 하는 3분 칼럼의 프레시안과의 동시 연재입니다. www.e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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