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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Before Sunset)과 정치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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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Before Sunset)과 정치파행

김민웅의 세상읽기 <15>

파리는 혁명의 도시이기도 하고 또한 사랑의 도시이기도 한 것일까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 치열하게 보여주는 파리가 있다면, 영화 “프렌치 키스(French Kiss)”의 주연 맥 라이언과 케빈 클라인의 로맨스가 귀엽게 펼쳐지는 파리가 있습니다. 물론 니콜 키드만의 “물랑루주”가 드러내는 부르조아의 타락과 절제할 수 없는 욕망이 춤추는 파리도 있습니다.

한편, 짧은 시간의 사랑을 깊게 나눈 후 새벽이 오기 전(Before Sunrise) 헤어진 제시와 셀린느가 만나기로 했던 6개월 이후의 비엔나. 그러나 그것은 지켜지지 못한 약속 때문에 실종된 9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가 만나지 못했던 세월의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비포 선셋(Before Sunset)"의 파리는 여차하면 그저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에게 세심한 눈길을 돌리게 하고 있습니다.

에단 호크(Ethan Hawke)와 줄리 델피(Julie Delpy)가 주연한 “석양이 지기 전”은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변한 그들의 모습에 우선 아, 하는 신음을 내도록 만듭니다. 줄리 델피가 분한 셀린느는 어느새 열렬한 환경운동가로 변해 있고, 그러면서도 에단 호크가 연기한 제시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지난 과거와 비교해서 어떤지를 거듭 확인하는 여인의 초조한 속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영화는 파리의 어느 책방에서 시작됩니다. 세린느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 "This Time"을 써서 그 사이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제시는 자신의 책 홍보를 위해 유럽을 순방하다가 바로 그 서점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셀린느를 언제나 안타깝게 찾아다니던 제시는 그녀를 보는 순간, 황홀한 눈길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제시는 이제 비행기 시간을 맞추어 떠나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 두 시간 사이에 제시와 셀린느는 파리의 골목을 지나 세느 강을 타고 셀린느의 집으로 향합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아쉽지만 더 이상 이야기 할 수는 없군요. 아무튼, 제시와 셀린느는 그렇게 걸으면서 서로의 인생에 박혀 있는 아픔과 열망, 그리고 남아 있는 기대를 끊임없이 상대에게 쏟아냅니다. 영화는 대화 그 자체에 깊이 주목합니다. 미국 영화이면서 유럽적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이들의 모습에 대하여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잃어버린 시간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서서히 상대의 진실에 다가갑니다. 이미 달라진 모습과 아직도 여전한 모습을 번갈아 더듬어 가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개인사에서 세계의 문제에까지, 그리고 다시 사랑을 사이에 두고 정리해야 하는 스스로의 심정으로 정확하게 귀환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서로의 눈길에 젖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몰래 몰래 발견합니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그런 제시와 셀린느의 존재를 마치 자기 자신처럼 아무런 인위적 표정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기합니다. 그건 일상 속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깨우친 자의 연기라는 느낌을 진하게 줍니다. 사소한 것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 그저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사랑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하는 이의 눈길이 영화에 담겨 있습니다.

9년의 세월은 그렇게 해서 단절의 자취를 털어버립니다. 함께 걸어가면서 사실은 상대의 마음 속으로 걸어가는 이들의 애틋함. 그러면서 대화를 중단하지 않는 이들의 진실과 사랑에 대한 갈구. 석양이 지기 전의 파리는 그런 시간을 우리들에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법을 아마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마주 달리면서 상대에게 비켜나기를 요구하는 고함만 들리고 있습니다. 그 어떤 단절도 극복할 의향이 아예 없는 그런 세월이 이젠 정말로 힘겨워지고 있습니다. 아니면 너무나 익숙해져가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태양이 거리를 비추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 함께 걸으면서 다정하게 이야기할 만한 여유는 없는 것일까요? 이런 시절에 온화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 너무 순진한 것일까요? 석양의 파리가 서울보다 나아야 할 까닭이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에서 하는 3분 칼럼의 프레시안과의 동시 연재입니다. www.e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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