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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붙이만 번뜩이는 정치언어 그리고 '석양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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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붙이만 번뜩이는 정치언어 그리고 '석양 대통령'

김민웅의 세상읽기 <12>

“당신의 입술에서는 쓰디쓴 풀 맛, 샘솟더군요, 잊지 못하겠어요” 이렇게 시작되는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로 그는 등단하였습니다. 그것이 1959년 그러니까 그가 29세였던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입선했던 작품이었습니다.

1930년 부여에서 태어난 그, 시인 신동엽은 그렇게 우리가 살아온 고달픈 세월을 문학의 밭에 쟁기질 하듯 일구어 거짓 없는 진실의 속내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에는 아까의 그 첫머리를 따라 이런 대목이 이어집니다. “꽃이 핀 고원을 나는 지나고 있었어요. 무성한 풀숲에서 소와 노닐다가 당신은 가슴으로 날 불렀지요.”

신동엽의 영혼은 꾸미지 않는 자연과 가리지 않는 진실의 산야(山野)에서 기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의 필명이 돌과 숲을 의미하는 석림(石林)이었다는 점도 아마 그런 뜻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은 가슴으로 날 불렀지요”라고 했듯이, 가슴으로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이 시 정신은 4.19의 격렬한 역사를 만나면서 아주 뜨거운 색채와 빛나는 육성을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아사녀>라는 작품은 낡은 시대를 도도한 강물위에 떠나보내는 청춘의 힘을 격찬하는 시였습니다. 이 시에서 <아사달>과 <아사녀>라는 대목은 우리의 오랜 역사의 저류에 흐르는 생명의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말의 뿌리로 보면 아사달이란, 아사들, 곧 아침 들판이라는 우리의 옛 말이고, 하여 아사녀는 아침의 여인, 더 나가자면 그 아침을 맞이하는 순정이라는 뜻이 또한 될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로운 희망의 날이 밝았노라, 라는 외침이 이 시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것에 거짓이 끼어들면서 희망이 남루해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신동엽은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서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일갈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가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남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말입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인 1969년 그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는 절창을 남기게 됩니다. 한 대목만 읊어보지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것,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것,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그 보다 한 해 전인 1968년, 그는 <산문시 1>이라는 글에서 그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선물처럼 마련해줍니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고 하는 고장에서는”이라고 입을 뗀 그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라고 이어가면서 “그곳 사람들이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라고 우리의 현실을 거꾸로 풍자합니다.

그리고는 그 나라가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에는 가담치 않기로 한 그 지성...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 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실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라고 갑자기 스칸디나비아에서 홀연 난데없이 무대가 한반도로 바뀌더니, 우리가 꿈꾸어야 할 혁명의 미래를 노래합니다.

정치는 가능성의 종합예술이라는데, 우리의 정치언어에는 가슴을 겨누는 쇠붙이만 번뜩입니다. 가슴으로 뜨겁게 부르는 노래가 없습니다. 맑은 하늘에 도리어 먹구름을 끼게 하고, 자기들이 보는 세상만 옳다고 외치게 하는 쇠 항아리를 우리 머리 위에 덮으려 듭니다. 석양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 한수, 노래 한곡 부를 줄 모르면 이 땅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헌법은 만들 수 없는 걸까요?

아침을 맞이하는 들판에 서 있는 여인, 아사달과 아사녀의 빛나는 포옹을 기뻐할 줄 아는, 그런 세월을 우린 고대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에서 하는 3분 칼럼의 프레시안과의 동시 연재입니다. www.e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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