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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들의 일그러진 한국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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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들의 일그러진 한국학개론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

I. 1990년대 삶의 이중성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1990년대의 과거와 2012년의 현재를 서로 넘나들면서 대한민국의 서울과 제주도를 오간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과 남쪽 끝 제주도! 서울과 제주도의 지리적 관계는 1990년대를 정점으로 그 이전의 중심과 변두리라는 근대적 관계에서 하나의 지역과 또 다른 지역이라는 탈근대적인 일대일 관계로 변했다. 서울과 제주도의 관계적 변화처럼 지난 20세기 말이었던 1990년대는 분명히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다. 1990년대 이전의 근대 식민지성과 1990년대 이후의 탈근대적 자율성이 개인적이든지 사회적이든지 간에 서로 교차하는 지점이 1990년대이다. 그러나 정지우 감독의 <은교>에 등장하는 서지우(김무열 분)나 1980년대의 암울한 근대적 현재를 이야기하는 기형도 시인의 시를 영화로 만든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에 등장하는 이원상(박해일 분)과 같은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인들에게 제주도는 여전히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변두리의 끝에 있는 가장 소외되어 있는 변두리이다.

▲ 영화<건축학개론> 포스터 ⓒ명필름
<건축학개론>에 등장하는 승민(엄태웅 분)이가 살아가는 일상적 삶에서 서울과 제주도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첫사랑의 여인으로 승민이 앞에 나타난 서연(한가인 분)이의 집을 지어주기 위하여 승민이와 서연이는 서울과 제주도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서연이는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맞이했던 서울의 삶을 마감하고 제주도에 자신의 집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지만, 승민이에게는 아직 자신의 집이 없다. 집은 누군가와 더불어 사는 영토다. 서연이가 이혼을 하고, 아버지가 있는 제주도의 집을 새롭게 다시 지으려고 하는 것은 누군가와 더불어 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아련한 첫사랑의 승민이에게 집의 설계와 건축을 부탁한 것이 아닐까? 그 집이 서연이의 집이면서 또한 승민이의 집이 될 수 있을까? 승민이와 서연이가 새롭게 지으려는 집은 마치 1990년대 이전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이라는 근대의 대한민국에서 서로 헤어졌다가 서로 더불어 사는 탈근대의 대한민국이라는 집을 지으려는 우리들과 같다.

II. 건축학개론과 한국학개론

ⓒ명필름

문제는 집을 짓는 가장 근본적인 건축학개론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2012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서연이와 함께 승민이는 1994년 신입생 시절의 건축학개론 강의실로 돌아간다. 건축학개론을 강의하는 강 교수(김의성 분)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부터 건축학은 시작한다"고 말한다. 건축학만이 아니다. 문학이나 철학, 정치학이나 경제학의 모든 학문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집과 내가 일하고 있는 집과의 일대일 관계적 선분을 긋는 것.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아는 것과 그 관계적 선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강 교수는 학생들이 현재 살고 있는 서울의 각 지역들에서 학생들이 현재 공부하고 있는 대학교를 버스 노선이나 지하철 노선을 따라 선분을 긋는 것으로부터 강의를 시작한다. 건축학뿐만 아니라 모든 인문학이나 사회철학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학이라는 우리의 인식의 집도 그 내부적 지역들과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적 선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1994년의 승민(이제훈 분)이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의 정릉이라는 지역을 강남의 지역에 대비하여 열등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릉은 1990년대 이전까지 서울의 다른 여타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서울을 구성하는 하나의 점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방배동이나 돈암동이 서울을 구성하는 다양한 선분들의 두 개의 점이듯이 정릉과 개포동은 서울을 다양한 선분들로 구성하는 수많은 점들 중의 점들이다. 승민이가 정릉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열등한 곳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마치 1990년대 이전의 근대 식민지성이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일본이나 미국에 비교하여 열등한 곳이라는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근대 식민지성은 항상 우리의 삶을 지리적으로 양분한다. 일본과 미국이라는 근대 식민지 모국과 식민지 피지배 지역, 본국의 이주민 지역과 식민지 원주민 지역, 중심과 주변, 서울과 지방 등등.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강남은 본국의 이주민 지역도 아니고 서울의 중심도 아니다.

199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강남과 강북의 근대적이고 식민지적인 이분법을 통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자신의 존재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열등감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의 자본이나 권력 중심으로 유지되고 1990년대 이전의 근대 식민지성이다. 그러한 근대 식민지성은 자기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연인관계와 친구관계 그리고 가족관계를 파괴한다. 근대 식민지성이 지니고 있는 일상적 삶의 관계적 파괴성과 폭력성이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연인과 친구 그리고 가족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정릉에 사는 것을 열등감으로 인식하고 있는 승민이는 서연(배수지 분)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고, 단지 서연의 사랑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랑은 두 사람 간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관계이고,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를 서로의 삶이 함께하는 미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남성중심적인 기교의 차원으로만 인식한다.

199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근대 식민지성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강남에 살고 있는 선배 재욱(유연석 분)이와 재수생 친구 납뜩이(조정석 분)이다. 바람둥이인 재욱이는 관계를 자본의 관계로 인식하고, 여고생을 사귀고 있는 납뜩이는 관계를 남성 중심의 권력의 관계로 인식한다. 그러나 같은 대한민국의 제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서연이는 다르다. 그녀에게 서울은 모두 서울이다. 강남과 강북의 구분은 서울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선배 재욱이 앞에서 자신을 가지고 그녀를 여자 친구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승민이를 이해할 수 없고, 느닷없이 그녀 앞에 나타나 "꺼져!"라고 말하는 승민이의 어설픈 폭력성을 이해할 수도 없다. 아마도 그녀가 승민이와 헤어지고 난 후의 서울의 경험은 또 다른 근대 식민지성의 열등감으로 가득 차있는 승민이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적 근대 식민지성에 함몰되어 있는 또 다른 재욱이거나 납뜩이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2012년의 현재 근대 식민지성의 온상인 서울에서 벗어나 제주도로 온 것이다.

2012년의 승민이는 변했을까? 아니다. 인식은 결코 개인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관계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만들고, 의식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만든다. 그래서 서연이가 다시 승민이를 찾은 것은 승민이가 근대 식민지성에서 벗어나 하나의 자율적인 개체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건축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근대 식민지성의 열등감을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삶의 장소로서 강남에 대한 열등감이 건축학이라는 학문으로서 미국의 건축학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근대 식민지성의 인식으로 인하여 정릉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의 토대를 잃어버린 것처럼 대학교 1학년 시절에 배우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건축학은 시작한다"는 개론의 지식도 없이 그냥 미국의 건축학에 대한 열등감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를 찾은 서연이로 인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다시 인식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민이의 근대 식민지적 의식은 다시 서연이에게 화를 내는 어설픈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III. 제주도와 미국이라는 두 개의 삶

ⓒ명필름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도 등장하는 것처럼 1990년대는 한국 사회의 건축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집단적으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한 시대이다. 그것은 건축학만이 아니다. 문학도 그렇고, 역사학도 그렇고, 사회학이나 여타의 학문들이 모두 그렇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삶과 마찬가지로 모든 학문은 내가 살고 있는 터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변과의 관계, 그리고 각각의 관계들이 지니고 있는 일대일 관계의 상호생성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개론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사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부산이나 광주, 혹은 대전이나 춘천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소도시나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역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 일대일의 관계가 생산적이며 상호생성적이라는 탈근대적 인식이 등장한 것이 1990년대이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비록 불협화음은 있을지언정 구소련은 새로운 러시아와 다른 여타의 나라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중국은 새로운 중국으로 거듭났으며, 독일은 동서독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유럽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1990년대에 우리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 식민지 권력의 계승으로 인하여 근대 식민지성의 정치적 권력과 자본의 권력은 지속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교육과 문화적 장치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열등감을 강요한다. 그 열등감의 근본, 즉 근대 식민지성의 실체는 영어 식민지성이다. 1990년대 이전 영어 식민지성은 지구촌 곳곳에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는 아니다. 스페인어권의 중남미 나라들이 영어 식민지성에서 벗어나 스페인어권의 문화로 돌아가고 있고, 아프리카 또한 영어나 프랑스어 식민지성에서 벗어나 그 지역의 언어를 회복하기 위한 아프리카 르네상스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영어는 결코 이 지구촌 세계가 움직이고 우리의 일상적 삶을 구성하는 실체가 아니다. 199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199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영어는 권력과 자본의 언어이지 결코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일상적 삶의 언어가 아니다. 그 권력과 자본의 언어가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배하는 근대 식민지성이 바로 영어에 대한 열등감이다.

승민이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시간에 서연이는 승민이가 지은 제주도의 집에 있는 작은 어항 속에서 노닐고 있는 붕어들을 바라본다. 서연이는 아마도 어항 속에서 노닐고 있는 붕어들을 보면서 근대 식민지성에 사로잡혀 자신의 사랑과 삶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승민이와 신자유주의의 환상을 좇는 재욱이와 납뜩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근대 식민지성의 대한민국이라는 어항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승민이만은 근대 식민지성의 작은 어항 속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 근대 식민지성의 건축학이 아니라 탈근대의 건축학은 미국의 건축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정릉의 한구석에서 찾아낸 빈집의 한옥처럼 대한민국 곳곳에 숨어 있는 빈집의 한옥들을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승민이에게 자신이 사는 집을 부탁한 것이 아닐까? 영화관을 나오면서 승민이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진실한 삶과 사랑을 깨닫고 제주도의 서연이 곁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은 단지 나만의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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