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고대 팔레스타인의 변방, 갈릴리에서 당시 흔하디흔한 이름을 가진 한 시골 청년이 어느 날 황량한 들판에 바람을 몰아치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건 마치 지진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은 당시 미래의 희망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 안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은 열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눈을 떠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토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건 아냐,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어. 다른 길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고 싶어.”
새로운 선택, 그것은 좌절과 절망을 넘어서려는 깊은 갈망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을 향한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의지를 키우고 그 의지를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행동, 그들의 삶은 거대한 제국 로마의 요구에 묶여 있었고, 그에 더하여 “율법”이라는 이름의 온갖 힘겨운 장치들로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을 어기거나 문제로 삼으면 그는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자로 몰렸습니다. 율법은 성역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아래에서 자유는 반역으로, 권리는 죄로,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품는 것은 도전으로 낙인찍히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는, 오늘날로 치면 국가보안법처럼 사수하는 집단들이 그런 낙인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역이 된 율법은 이들에게 어떻게든 방어해야 하는 자기들만을 위한 가시철망이었습니다.
갈릴리에 나타난 그 청년은 이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서 율법의 포로가 되어 있던 사람들의 고단한 심정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들의 눈물, 이들의 상처 그리고 이들의 갈구와 하염없이 만납니다.
그 청년은 이들의 주위를 성역처럼 둘러쳐 있던 가시철망을 걷어치우고 이루어내야 하는 자유와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조용한 음성의 시인처럼 때로는 격정적인 웅변가처럼 울려 퍼지는 하늘의 소리였습니다.
주저하며 확신을 갖지 못했던 이들에게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세상이 그렇게 깔보듯 작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겨자씨가 겉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작은 것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 안에는 이미 겨자 나무가 들어 있답니다. 겨자 나무가 들어 있지 않은 겨자씨는 없습니다. 그 겨자나무는 겨자씨의 꿈이요, 사랑이며 자유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하늘의 꿈을 품으면 여러분의 미래가 곧 하늘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굳게 믿고 결연히 용기를 내십시오.”
이 꿈으로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들이 마침내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입을 열어 외쳤습니다. “율법이 지배하는 시대는 이제 낡았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러자 으리으리한 성전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있던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깜짝 놀라 그 청년을 반역자로 몰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시대를 교체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심판을 모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역사에서 영원히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낡은 포도주의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그 청년의 이름을 보수하고 있다고 하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 일부가 제조하고 있는 포도주의 이름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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