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그 화풍이 루오를 닮기도 했고, 샤갈이 느껴지기도 하며 때로는 피카소와 미로의 중간에 있는 듯도 합니다. 당시 서양미술의 최첨단과 만난 이의 자기표현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리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겨진 은백색 종이 위에 철필로 그려진 소년과 물고기, 그리고 게와 바다를 보면 그건 완연히 다른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보입니다.
원산에서 부산, 그리고 제주도와 통영은 모두 그의 가슴에 바다를 안겨다 주었던 것 같습니다. 한 때는 선한 눈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센 기운을 뿜어내는 “소”가 그의 주제인 듯싶더니 어느새 그의 눈길은 들판에서 푸른 해심(海心)을 향해 달려갔던 모양입니다.
1916년 평남 평원군 송천리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그의 천재적 열정과 재능을 비극적으로 마무리한 채 마흔을 겨우 넘긴 나이로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유산은 우리의 영원한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중반, 뉴욕에 있는 모던 아트 뮤지움에는 그의 은지화 유작 3점이 걸리게 되는데 그건 그가 참으로 가난하고 괴로웠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참 놀라운 느낌을 줍니다.
그가 어려운 때에 요양하면서 기거했던 왜관의 집 주인, 이제는 그 자신도 고인이 된 시인 구상은 중섭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판자집 끝 방,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노동을 하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충무.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그렇게 중섭을 떠올린 시인 구상은 그 처참한 곤경 속에서도 그 숱한 그림을 그려 이 시대의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특별히 주목합니다. 그 대중들의 사랑은 결국 그의 그림이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은지화를 볼 때마다 드는 느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의 화풍이나 화가로서의 독창적인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은지화는 깨끗한 은백색의 종이에 그린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땅바닥 또는 쓰레기에 버려진 채 구겨진 담배갑 은박지 위에 그가 철필을 눌러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지화를 그릴 당시 이중섭의 삶은 고난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빈곤은 그를 혹독한 지경으로 몰아놓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힘겨운 나날이었다고 합니다. 화가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화구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구겨진 은지화는 마치 그의 재기하기 어려운 절망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동경 유학 시절 이후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던 예술가로서의 꿈과 그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폐지처럼 버려진 은지화 위에 그의 영혼을 불어넣은 철필을 눌러 한 획 한 획 그었을 때, 그것은 폐지가 아니라 어느새 새로운 생명을 얻어가는 인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구도자의 위엄으로까지 다가오는 모습입니다.
때로 신화 같기도 하고 때로 전설 같기도 하며 때로는 동화의 세계인 듯 한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꿈과 열정을 되살려놓은 예술가의 영원한 혼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아 이건 이제 폐지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삶과 절망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시선과 강인한 의지의 철필로 새로 밑그림을 그려나간다면 혹 압니까? 그 안에 바다가 푸르게 넘실거리게 될지 말입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에서 하는 3분 칼럼의 프레시안과의 동시 연재입니다. www.e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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