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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심문관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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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심문관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김민웅의 세상읽기 <3>

얼마전 허리케인 “이반”이 카리브 해의 섬들을 강타하고 미국 플로리다 지역도 비상사태에 몰아 놓은 바 있습니다. 이 태풍은 “이반 뇌제”라는 별칭까지 얻을 정도로 강력 4급에 분류되었는데 엄청난 힘으로 지나가는 길에 있는 것은 모두 휩쓸어 버리는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이반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의 형제들인 드미트리, 그리고 알료사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름이지요. 그들의 아버지 카라마조프는 욕심과 유치한 구습에 사로잡혀 있어서, 세 아들들의 경멸과 마침내는 살해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 셋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버지를 직접 살해하지는 못합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殺父)”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은 이 셋이 다 유사하지만, 그 강도와 깊이는 각기 다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들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카라마조프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선과 악이 대결하는 현장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마음으로 설정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인간정신의 복잡한 현실을 주목하도록 만듭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사형장에서 죽기 직전 살아났던 극적인 경험으로 해서, 그가 선과 악,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기존의 관습이나 윤리 또는 종교와 법에 의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반이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목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장면 하나가 “대심문관”이라는 장입니다. 때는 16세기, 장소는 스페인. 이단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행해졌던 상황을 무대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심판을 행하는 대심문관이 예수 자신이 그 땅에 나타나자 그를 향해 비난의 어조를 퍼붓는 대목입니다. 왜 왔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당신은 교회에 모든 권위를 넘겨주었으니 더 이상 이 땅의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외쳐댑니다.

이 장면의 마지막은, 예수가 대심문관의 말을 조용히 듣고는 그에게 입맞춤하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이반은 이 장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입맞춤은 대심문관의 가슴 속에서 광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노 대심문관은 여전히 그의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음으로는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생각은 낡은 껍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순을 폭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도처에서 그런 대심문관들이 낡은 생각과 제도에 여전히 집착하면서 진실이 이 땅에 찾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세대의 무지몽매한 거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길고 강하면, 자식인 이반과 그의 형제들의 반란이 올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자유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억압할 수 없습니다. 대심문관은 이후 역사에서 도리어 그 자신들이 정죄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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