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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로맨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42> 중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5)

백두산 천지의 북쪽 귀퉁이의 달문으로 흘러나오는 물은 장백폭포로 떨어져 송화강 지류인 이도백하를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천지에서 직접 흘러나오지 않지만 백두산 주봉 밑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백두산에 원류를 둔 강으로 이 셋을 꼽는다.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백여 리 흘러내려 오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서쪽 내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며, 두만강은 동쪽으로 백여 리 흐르다가 동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동해 부근에 이른다는 것이 우리 머리 속에 그려져 있는 대강의 지도다. 그러나 막상 백두산에 올라가 보면 두만강의 발원지는 압록강 발원지의 바로 옆 골짜기로, 주봉의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다. 주봉의 동쪽은 물의 흐름도 뚜렷하지 않은 밋밋한 고원지대가 수십 리 펼쳐지다가 북쪽으로 꺾어져 송화강 지류로 내려간다.

1712년 목극등(穆克登)은 두만강 발원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송화강 유역인 주봉 동쪽에 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에 “西로는 鴨綠, 東으로는 土門”이라 한 것처럼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찾은 것인데, 주봉 동쪽의 흐름이 수십 리 밖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는다는 사실을 탐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토문강’의 원류로 착각한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의 건국 초기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두 나라 국경으로 보는 것은 상식이었다. 이 경계선은 고려시대보다 북쪽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몽고 정복 때까지 고려의 판도는 두만강에 미치지 못했고, 지금의 함경도 지역 대부분은 여진족의 영역이었다. 몽고가 이 지역을 쌍성총관부로 지배하는 동안 고려인이 많이 이주했고, 원나라가 무너질 때 고려가 점령한 것이었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강토를 물려받는다는 원칙 아래 이곳에 철령위 설치를 검토하여 위화도 회군으로 끝난 고려의 출병을 유발하기도 했으나, 이 지역 출신을 왕실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만 것이다.

과거의 여진족을 주축으로 한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하게 된 후 동부 만주 일대를 황실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封禁)으로 묶어놓고 이주와 개발을 금지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으로는 수십 리 폭의 무인지대를 설정하고 책문(柵門)을 만들어 통제했다. 당시 청나라의 국토 측량과 지도 작성에 종사한 서양인 선교사들이 그린 지도에 더러 두 강의 북쪽으로 나란히 그려진 경계선은 청나라가 관리한 ‘민통선(民統線)’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에서도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에 넓은 통제지역을 두고 있다가 정계비 설치 이후 민간에 개방했는데, 이를 빌미로 이 지역이 원래 청나라 영토였다고 주장한 중국인들도 있다.

청나라에서 목극등을 파견해 정계비를 세운 것은 영토 확장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봉금정책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천하국가의 자리를 잡은 청나라에게는 직접적인 지배의 영역을 넓히는 것보다 천하체제를 원만하게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었고, 특히 봉금지역은 황실의 발상지로서 상징적 의미 때문에 개발보다 보존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자원에 비해 인구가 적은 상태가 오래 되다 보니 범월(犯越), 특히 조선인의 범월이 늘어나고 있었으므로 정계비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청나라의 목적이 확장이 아닌 안정에 있었으므로 조선측에 범월의 동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배려하였고, 조선 조정에서 사은사(謝恩使)를 북경에 보낸 데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계비 설치 이전에는 조선인의 범월이 늘 문제가 되었으나 이후에는 중국인의 범월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는 데서도 사정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조선 조정에서 1712년 감계(勘界)의 결과에 만족한 데 반해 민간, 특히 일부 실학자들 사이에서는 많은 불만이 토로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규경이 “한 마디도 다투어 밝히지 못하고 수백 리 강토를 앉아서 잃고 말았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것은 당시까지 실제 다스리던 영토를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는 물론 발해까지도 민족사의 범주에 넣으려는 당시 일부 실학자들의 의식에 입각하여 민족의 고토(故土) 상실을 기정사실화했다는 비판이었다. 여기에는 만주족을 열등한 오랑캐로 보는 편견도 작용한 것이었다.

청나라의 성세가 유지되는 동안 두 나라 사이에는 국경에 관한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게 거듭 굴욕을 겪고 러시아의 진출에 대비해 1870년대 이후 봉금을 철폐하면서 문제가 일어났다. 1869-70년의 연속된 흉년 이래 상당수의 조선 유민이 청나라의 통제가 약화된 틈을 타 두만강 북쪽에 정착하였는데, 청나라가 이 지역의 개발과 자국민 이주를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조선 이주민을 배려하지 않는 관리 방침을 세운 데서 비롯된 문제였다.

1882년 청나라는 “간도에 정착한 조선인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청나라 국적에 편입시키겠다”고 조선 정부에 통보했다. 이듬해 청나라 지방 관헌은 간도에 정착한 조선인을 조선 경내로 돌려보내겠다고 종성과 회령 두 읍에 고시했다. 이에 위협을 받은 현지 조선인들은 자신의 거주권을 지키기 위해 두 나라 관헌에 호소하였는데, 그 근거로 ‘土門’이 두만강이 아니라는 이강설(二江說)을 제기한 것이다.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른 강이라는 이강설 역시 일부 실학자들이 주장해 온 것이었다. 예를 들어 신경준은 “독류하집”에서 “모두들 토문과 두만을 하나의 강으로 여기지만 ‘용비어천가’에 의하면 두만강 북쪽, 회령에서 하룻길 떨어진 곳에 토문강이 있어 역시 백두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른 뒤 두만강에 들어간다”고 하여 해란강(海蘭江)을 가리킨 듯하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해란강 발원지가 백두산 주봉에서 직선거리로도 150 리나 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이익은 이강설에 반대하여 “성호사설”에 “토문은 곧 두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방으로 땅을 넓히고 싶어하지만, 옛날에는 북쪽 지방이 모두 말갈의 땅이었고 지금은 강역이 정해졌는데, 왜 꼭 필요하지 않은 땅을 다투어 말썽을 일으키려 하는가?” 한 대목이 있다. 이강설이 척지(拓地)의 욕심에서 나온 억지로 본 것이다.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사람을 시켜 백두산을 탐사케 하고 종성 부사로 하여금 중국 지방관헌에 조회문을 보내게 하였는데, 정계비 위치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어져 송화강 상류 오도백하가 되는 물줄기가 토문강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위엔스카이(袁世凱)는 이에 대해 “그러면 길림성을 통째로 내놓으라는 말인가?” 하고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 감계회담이 열린 결과 조선은 토문강이 두만강임을 인정하였고, 청나라 측은 강 북쪽에 정착한 조선인들에게 땅을 빌려주는 등 포용정책을 펴기로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래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측이 어느 정도 이상 강경한 자세를 취하기도 어려웠고, 원래 현지인의 생활권 때문에 제기된 문제이므로 청나라의 개간정책이 포용적인 방향으로 조정됨에 따라 분쟁을 계속할 동기도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

청일전쟁(1894-1895)과 의화단사건(1900)으로 청나라의 위세가 무너짐에 따라 몇 해 동안 잠잠하던 간도 국경문제를 조선-대한제국이 다시 들고 나오게 되었다. 1897년 함북관찰사를 시켜 현황을 다시 조사하게 하였고, 1903년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파견, 조세를 징수하고 병력을 양성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화되고 러시아가 1900년 이후 간도에 진출하는 등 상황 변화에 응해 이주민을 보호하려는 조치였지만, 청나라의 쇠퇴를 틈타 일본과 러시아를 업고 국세를 확장하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러일전쟁 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일본은 민주 진출을 위해 청나라를 도발하고 압박하는 데 대한제국을 앞세워 간도 문제를 이용했다. 1909년의 이른바 ‘간도협약’은 일본이 만주의 철로부설권과 광산채굴권을 획득하면서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정한 것이었으니, 일본은 실리를, 청나라는 명분을 건진 타협이라 할 수 있다.

며칠 전 김원웅 의원이 보낸 뉴스레터에는 ‘간도협약의 원천적 무효 확인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고 자랑스럽게 써 놓았다. 과연 대한민국 국회의 결의안이 1909년의 ‘도문강중한계무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되찾아야 할 우리 땅, 간도”라는 말에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신라 통일 이래 한민족의 국가가 두만강 건너 간도지방에 지속적인 행정을 펼친 일이 없다. 두만강까지 국경을 넓힌 것도 조선왕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그리고 조선인이 간도지방에 대규모로 이주해 조선문화를 지키는 사회를 이룬 것은 1870년대 이후의 일이다. 1880년대 이후 청나라 세력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이 조선족사회 때문에 간도분쟁이 일어났으나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간도협약으로 일단락되었다.

강압하에 이루어진 을사보호조약의 원천적 무효를 주장하고, 그 조약을 근거로 행해진 일본의 수탈에 배상을 청구하는 일이라면 성패는 차치하고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을사보호조약에서 파생된 일체의 대외조약을 무효로 하자는 주장이라도 인정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간도협약 하나를 문제삼으면서 그 이유로 “되찾아야 할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간도가 되찾아야 할 우리 땅인 이유가 무엇인가? 1880년대 이후의 간도분쟁에서는 토문강이 두만강보다 북쪽에 있는 다른 강이라는 ‘이강설(二江說)’이 조선측 주장의 주축이었다. 이것은 현지 이주민들의 답답한 사정을 풀 다른 마땅한 길이 없기 때문에 일부 실학자들의 치우친 견해에 의탁한 것일 뿐이다.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면 어느 강이란 말인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은 셋 뿐인데, 만주 복판을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이 토문강이고 그 동쪽이 모두 조선땅이라고 목극등이 인정했다는 말인가?

또 하나의 이유라면 이곳이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라는 것을 이야기들 한다. 이것이 필자의 마음을 참으로 착잡하게 만드는 일이다. 고구려를 민족사의 원류로 숭앙한다면 그 문화와 정신을 물려받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받드는 조상이 한 때 점령했던 땅이라는 이유로 “우리 땅”임을 주장한다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내세워 조선 침략을 정당화한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일본 천황가가 백제에서 흘러나왔으니 백제의 옛 땅을 내놓으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개혁 성향을 자임하는 의원들이 이번 결의안 발의에 많이 참여한 것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개혁이란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이 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좋다는 것이 자기에게만 좋고 남에게 나쁜 것이라면 사리사욕을 위해 개혁을 팔아먹는 짓일 뿐이다. 너와 나 구별 없이 세상이 모두 좋아지도록 애쓰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조소를 받는 자칭 개혁파의 사고방식이 “간도는 우리 땅” 주장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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