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정가의 핫 이슈로 떠오르자 한국의 일부 언론들은 아르헨티나의 과거청산문제를 집중 거론하면서 아르헨티나는 "대대적인 인권침해를 자행한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책임을 물었던 나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군 장교에 대한 재판과 함께 이뤄진 진실위원회의 노력으로 아르헨티나는 어려운 과도기에 진실과 정의를 세운 나라의 상징이 됐다.”고 실로 오랜만에 아르헨티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사진1> 지난 정부가 군부만행에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해 사과하고 과거 청산을 약속하는 키르츠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Casa Rosada 공보실
한국의 언론들이 평가한 대로 아르헨티나의 과거청산은 정말 성공한 것일까?
지난 1976년부터 82년까지 무자비한 군사철권통치의 시대를 겪은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직도 당시 체포 혹은 납치되어 생사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실종자수가 3만6천 여명에 이른다.
지난 82년 영국과의 포클랜드전쟁에서 패한 군부는 스스로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983년 변호사 출신으로 민선 대통령에 당선된 라울 알폰신은 실종자 가족들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여 국내외 유명인사들을 위원으로 하는 '실종자들에 관한 국가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의 노력으로 군부의 만행이 어느 정도 자세하게 드러났으나 통치기반이 허약했던 알폰신은 당시 군 고위장성급 몇 명만을 단죄하고 상부의 명령에 복종한 하급관료나 장교들은 단죄할 수 없다는 ‘명령복종법’을 신설, 이들의 단죄를 역사에 맡겼다.
그 후 피해자 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알폰신의 뒤를 이은 까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지난 90년대 초 감옥에 수감돼 있던 군 장성들을 사면 복권시켜주어 상당수가 국회 또는 지방정부 수장으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그러다 지난해 5월 취임한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잔재 청산을 천명하고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령을 무효화시키고 사면된 군 장성들의 재수감을 단행했다.
<사진2> 지난 주 '5월의 광장 어머니회' 임원들과 만나 과거청산을 약속하고 있는 키르츠네르 대통령.@Casa
Rosada 공보실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지난 3월 군정통치 28주년 기념식장에서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정 당시의 비인륜적인 잔혹한 군인들의 행위에 대해 20년 동안 정부가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려 이곳에 왔다.”고 말해 지난 정부의 과거청산이 실패했음을 시인하고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수만 여명의 군정 당시의 피해자 가족들과 인권 단체대표들이 기념식에 참석, 정의와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 이들은 군정 당시 민간인 학살에 참여했던 군 관계자들이 아직도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호의호식하고 있다면서 가해자들의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피해자 가족들과 시민대표들은 군정 당시 고위직을 누렸던 현 정부 인사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대통령의 정치적인 결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아르헨 사법부, '군정 관련 장성들 사면령은 위헌' 판결**
대통령의 과거청산 의지와 국민여론을 의식한 아르헨 법원은 군정 당시 시민들과 학생, 정치가들과의 ‘더러운 전쟁’을 벌인 군부 지도자들에게 대통령이 내린 사면령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아르헨티나 연방법원은 까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이 군부 집권 당시 고문과 납치, 유괴 등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군 고위장성들을 사면한 대통령령이 위헌이라며 현재 생존해 있는 3명의 퇴역 장성들을 재수감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아르헨 법원은 이 판결문에서 ‘사면령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집행돼야 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대통령의 권한보다 법의 권위가 앞선다’는 판결인 것이다.
아르헨 법원은 또한 최근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는 시효가 없다”는 판결과 명령복종법을 무효화 시킴에 따라 군정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사진3> 최근 군부대를 방문한 키르츠네르 대통령. 아르헨티나군은 키르츠네르 취임 후 군정 관련 중장급 이상
고위장성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Casa Rosada 공보실
따라서 아르헨티나의 해묵은 군정 청산 문제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지금까지 군정 기간 동안 군 고위직이나 정부관료를 지냈던 인사들이 옷을 벗는 것으로 면죄부를 주던 과거와는 다르게 법의 공정한 심판 아래 처벌을 해야 한다는 피해자가족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군부 역시 육군 사관학교 교장실에 걸려 있는 군정 당시 대통령들의 초상화를 떼어내고 해묵은 오욕의 역사를 청산할 의지를 보였다.
지난 76년 정권을 잡은 군부가 반정부인사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였던 ‘더러운 전쟁’은 반정부 운동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자비하게 민간인 사냥을 벌여 이들을 군 병영 안에 감금시키고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고문으로 5천 여명이 사망했다. 늘어나는 정치범 수용에 골머리를 앓던 군부는 야밤에 정치범들의 발목에 벽돌을 매달아 비행기에 태워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실종자들의 고문실태와 실종의 원인을 다룬 ‘야간비행’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군정 당시 정치범들이 어떻게 인권유린을 당했으며 어떻게 실종되었는지를 생생하게 고발하기도 했다.
***군사정권도 못 막은 어머니들의 집념**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최근 아르헨티나 실종자 모임의 상징인 마드레스 데 플라쟈 데 마죠(5월의 광장 어머니회)와 아부엘로스 데 플라쟈 데 마죠(5월의 광장 할머니회)지도자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 아르헨티나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군사정권시대의 과거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짐하기도 했다.
5월의 광장 할머니회와 어머니회는 군사정권 당시 손자와 아들들을 잃어버린 어머니들과 할머니들로 구성된 순수한 인권단체로서 아르헨 과거청산의 선봉장 역할을 해왔다. 이들은 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지난 77년부터 지금까지 매주 목요일 대통령 궁 맞은편 5월의 광장에 모여 침묵의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정부시위를 무자비하게 강제 진압했던 군부도 이 어머니회 시위만은 눈감아주었던 것이다.
27년간이나 자식과 손자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노심초사 정부와 언론들을 상대로 과거청산을 호소해 온 이들의 해묵은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군정관련혐의로 줄줄이 옷을 벗은 군 장교들과 경찰 간부출신들이 현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회불안을 부추긴다는 설이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어 아르헨티나의 과거청산도 간단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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