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무척 아팠다고 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을 맡고 있는 김육훈(서울 상계고) 교사는 그래서 프레시안과의 인터뷰를 앞두고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뺐다고 했다.
다른 이유로 인해 이를 뽑아야 했겠지만 여전히 입 속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억누르며 우리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짚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왠지 ‘비장함’까지 안겨주었다. 그런 김 교사와 지난 25일 서울 상계고등학교 한켠에 마련된 조용한 연구실에서 ‘밀담’을 나눴다. 공간적인 이유로 목소리를 줄여야 했지만 김 교사의 내면은 교육 정책당국을 향한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지난 88년 창립된 전국역사교사모임은 연회비를 내는 회원교사만 전국적으로 2천여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규모의 역사 관련 단체다. 이 모임은 지역별 역사교사모임도 조직돼 있으며, 주로 교과연구나 지역사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국영수’ 위주로 해놓고 역사교육하라는 건 모순”**
프레시안: 얼마 전 개학을 했으니 아이들의 중국 고대사 왜곡 관련 질문이 많았을 텐데.
김육훈 교사: 대뜸 ‘한판 붙자’고 하더군요. 일부는 ‘우리도 중국사를 왜곡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이처럼 아이들의 반응은 대단히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럴 때일수록 토론이 필요합니다. 교사는 최근 중국이 역사왜곡을 하게 된 과정과 동향, 그들의 논리, 그리고 이에 대한 반론 등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아이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스스로 정리하고 국수주의적인 관점은 대부분 중화시킵니다. 교사들은 과거사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할 미래도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은 또, 교사 개인의 관점도 물어옵니다. 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역사왜곡은 과거사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존재하는 중화주의와 패권주의에서 발생한 문제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역사왜곡을 막는 것은 패권주의가 띠는 침략주의를 일소하고 한·중 두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프: 이번 일을 통해 우리 국사교육의 문제점이 많이 지적되고 있는데.
김 교사: 한마디로 ‘국영수’ 과목만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국사과목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현재의 짧은 수업시수 속에서 그 두꺼운 책을 공부하라고 하면 진저리를 칩니다. 더군다나 현행 입시제도는 실업계나 이과의 경우 아예 국사교육을 포기하고 있어요. 그럼 문과는 좀 나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국사와 근현대사는 선택과목이예요. 반드시 국사를 공부해야만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은 서울대 정도이고, 나머지는 11개 교과 가운데 1~4개를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외울 거 많은 국사를 아이들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겁니다.
프: 그럼, 입시에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한다면 좀 나아지려나.
김 교사: 문제는 이런 교육과정을 만들어낸 7차 교육과정입니다. 이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당장은 대학에 대한 행정지도를 통해 선택과목 가운데 국사 또는 근현대사를 필수로 지정하는 학교를 최대한 늘려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교육과정을 개편해 국사와 세계사를 유기적으로 관련짓는 방식의 틀이 마련돼야 하고, 또 수업시수도 강화해야 합니다.
***“전세계에서 한국 역사교육 가장 소홀”**
프: 다른 국가들의 역사교육 시스템은 어떤가.
김 교사: 미국은 역사를 중심으로 한 사회과로 편제돼 있습니다. 7학년 때는 세계지리와 세계역사를 배우고, 8학년 때는 미국사, 9학년 공민 또는 미국정부론, 10학년 세계사 또는 세계연구, 11학년 미국사, 12학년 미국정부론 등을 배웁니다.
일본은 중학교의 경우 사회과 안에 역사과를 두고 있어 1학년 때는 지리를, 2학년 역사, 3학년 공민과목을 가르칩니다. 2학년 역사는 세계사와 자국사를 결합시켜 놓은 형태입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세계사 교육을 필수로 하고 세계사 A·B, 일본사 A·B 등을 선택과목을 두고 있습니다. 일본사는 선택이지만 대다수 학교에서 필수로 가르칩니다.
유럽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지만 자국사와 세계사를 묶어 역사 또는 역사지리 교과 속에서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유럽의 경우 자국사와 유럽사가 유기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근현대사는 세계적 차원에서 교습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자국사와 세계사를 1대 1의 비율로 가르칩니다. 중학교에서 중국사와 세계사를 일반으로 가르치고, 고교에서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가르칩니다. 중국 전근대사는 선택과목이지만 실제로는 대다수의 학교들이 이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프: 결국 우리 역사교육도 개편이 불가피한데, 어떤 방향이 옳다고 보나.
김 교사: 현재 사회과의 일부로 편성돼 있는 역사를 독립시켜 별개의 교과로 가르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회과 교사들에게 역사교육을 개방한 것 자체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국사와 세계사를 유기적으로 교육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중1은 한국사, 중2 한국사2, 중3 세계사, 고1 가칭 ‘세계사 속의 한국’과 같은 교과를 편성해야 합니다.
***“현행 역사교육, 근현대사 부분 더 강화 바람직”**
프: 몇 년 전 동료교사들과 직접 대안교과서를 만든 것으로 아는데.
김 교사: 교과서는 원래 하나여서는 안됩니다. 역사 서술이 하나일 수 없고, 공부하는 학생과 교사의 조건에 맞는 다양한 교과서가 있을 때 수업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정이 아닌 다른 교과서도 있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역사교과서는 단지 과거의 사실이나 과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현재적 관심사와 현재의 문제를 관련지어 생동감 있게 서술돼야 합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런 측면보다는 역사교육의 기본적인 지향을 일반적 관점에서 밝히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프: 역사교과서에 실린 고대사 분량이 매우 적다는 의견도 있는데.
김 교사: 고대사 서술 문제는 분량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점의 문제입니다. 기본적으로 현행 역사교육은 근현대사의 비중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고대사 분량이 적은 것에 대해 이를 식민사관의 잔재로 보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기본적으로 증거의 학문입니다. 따라서 증거로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단순히 식민사관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학의 학문적 성격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고조선이나 고구려사는 남한보다 북한의 연구 성과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만약 고대사 서술이 부족한 사료를 상상력과 이론으로 채우는 것이란 관점을 가진다면 교과서는 단정의 형태가 아니라 여러 관점과 부족한 사료를 동시에 제공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한-중-일간의 역사전쟁 도래”**
프: 한·중·일 역사전쟁을 보도하는 국내언론의 태도를 어떻게 보나.
김 교사: 국가주의에 대항해 국가주의를 들이대는 경향이 보입니다. 이번 역사왜곡 사태는 과거사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 한·중 관계를 어떤 관점에서 풀어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한편으로 한·중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연동돼 있는 한·중·일간의 ‘역사전쟁’입니다.
따라서 언론은 현실에 존재하는 역사왜곡 사태를 막는 중요성만큼이나 중국의 패권주의 경향,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비롯한 군국주의 부활문제, 평화를 지키고 공동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전략 등등에 대한 거시적인 검토를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철저히 평화주의적 관점에 서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