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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마인드’ 소유자 관람불가

김명훈의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23> ‘화씨 9/11’

조지 W. 부시의 모친 바바라 부시는 2003년 3월 18일 ABC 방송국의 아침 시사 프로인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하여 이라크 전쟁개시를 앞둔 찬반논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But why should we hear about body bags, and deaths, and how many, what day it’s gonna happen, and how many this or what do you suppose? Or, I mean, it’s, it’s not relevant. So why should I waste my beautiful mind on something like that? And watch him suffer.”

“그렇지만 우리가 왜 시체 운반용 부대, 그리고 사망자, 그리고 몇 명이나, 며칠 날 그 일이 벌어질지, 그리고 이건 몇이고 또는 가정하는 것들에 대해 들어야 해요? 혹은, 내 말은, 그건, 그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왜 내 아름다운 정신을 그런 것에 낭비해야 해요? 그리고 [왜]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봐야 해요.”

조리 없는 횡설수설 같지만, 이 말은 수천 수만 명의 죽음이 예고되는 전쟁을 바라보는 부시 일가의 섬뜩한 사고의 본질을 담고 있다. 바바라 부시는 자신의 ‘아름다운 정신’이 전쟁의 참혹한 현실에 ‘오염’되는 것이 싫으며, 이러한 현실로 자신의 아들(대통령)이 ‘괴로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단다. 무고한 민간인과 명령만 따라야 하는 졸병들이 수없이 죽어나가게 될 이라크 침공이 마치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얘기하며, 아들을 그 불편한 진실로부터 ‘보호’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 할머니의 썩은 귀족의식과 왜곡된 모성애에서 지금 미국과 국제정세를 뒤흔들고 있는 세력의 부조리가 메아리 친다. 18세기에 마리 앙뜨와네뜨가 했을 법한 말을 21세기의 첫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천연덕스럽게도 내뱉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바바라 부시의 이 말은 레이 브래드베리(Ray Bradbury)의 1953년 소설 ‘화씨 451(Fahrenheit 451)’을 연상케 한다. 소방관(fireman)이 불을 끄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태우기 위해 사이렌을 울리며 출동하여 불을 지르는 ‘방화관(放火官)’인 세상, 정부가 ‘불편한 현실’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미래의 반(反)이상향 사회(dystopia)를 그린 이 소설은 바바라 부시와 그녀의 아들, 그리고 동류의 인간들이 바로 지향하는 사회를 예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책 속의 정부는 전쟁을 일으켜 놓고 나서, 전쟁의 실상과 그 끔찍한 대가에 대한 얘기는 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지금 현실 속의 미국 정부는 바바라 여사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시체 운반용 부대(body bag)’를 기자들이 촬영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쿠웨이트에 파견 나가 있던 국방부 소속 화물 담당 직원이 운송기에 실려있는 성조기 두른 관들을 촬영해 신문사에 제공한 죄로 해고당하기도 했다. (미군 사망자에 대한 보도지침이 이럴진대, 이라크인 사망자에 대한 보도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화씨 451’의 2부에서는 국가(미국)가 은밀하게 치르고 있는 전쟁의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한 주부가 이렇게 말한다.

“I’ve never known any dead man killed in a war. Killed jumping off a building, yes...[중략], but from wars? No.”

(전쟁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건 못 봤어. 건물에서 뛰어내려서 죽는 건, 있지…[중략], 하지만 전쟁에서? 없지.)

아득한 미래의, 있어서는 안될 가상의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이 음산한 소설은 지금 미국의 현실을 그 본질의 차원에서 예언한 셈이다. 정부는 정당하지 않은 전쟁의 참상을 은폐하고, 제시카 린치 일병 구조작전 같은 헐리우드 못지않은 ‘영웅 이야기’를 날조하는데, 성조기로 눈을 가린 주류 언론들은 자발적으로 재갈을 물고 있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Fahrenheit 9/11)’은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와 성취를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브래드베리 소설의 제목을 훌륭하게 차용한 이 영화는 부시 정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은폐하려 했던 장면들을 만인에게 속 시원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을 바로 부시 정부가 조종하려 하는 ‘우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화법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보통사람이 이를 보고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이다.

예상했던 대로, ‘화씨 9/11’에는 무어 감독의 여지없이 편향적인 시각이 담겨 있고, 또 진위 파악이 불가능한 음모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말하는 진실의 핵심, - 즉 조지 W. 부시를 앞세운 미국의 지도층이 나라가 겪은 대참사를 정치적으로 악용했고, 결국 그 대가를 미국의 서민들과 무고한 이라크인들이 치르고 있다는 사실 – 은 상식적인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부할 수 없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가 제시하는 음모론들도, 이 시대에 필요한 음모론들이다. 이들 음모론은 (적어도 아직은) 완벽하게 입증될 수는 없을지언정,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얘기들이다. 부시는 2000년 대통령선거 이전에 플로리다 주지사인 동생 젭(Jeb)과 나란히 앉아 있는 자리에서 히죽거리며 “내 말 잘 들어둬요, 플로리다는 우리가 이깁니다. 적어둬도 되요(…we’re gonna win Florida, mark my words. You can write it down)”라고 말하고,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537표라는 초박빙의 표차로 플로리다 선거인단을 집어삼킨다. 그런데 잠깐, 재개표 과정을 관장한 플로리다주 국무장관은 부시진영의 플로리다주 담당 선거의장인 캐서린 해리스였고, 이 사람은 선거 이전에 대다수가 흑인인 1만여 명의 ‘전과자’들을 유권자 등록명단에서 제외시키도록 ‘작업’한 장본인이 아닌가. (흑인들은 보통 80% 이상 민주당을 찍는다.)

이렇게 영화 초반부터 부시의 대통령당선 자체를 음모론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무어는 이어서 빈 라덴 일가와 부시 일가와의 내통관계, 부시의 수상한 군 복무 기록, 딕 체니의 핼리버튼 커넥션, 아버지 부시가 수석고문으로 있는 칼라일 그룹과 사우디 왕가의 관계 등을 차례로 들춰낸다.

음모론 이외에도 온갖 반전(反戰), 반부시 이미지를 늘어놓는데 바쁜 두 시간 채 못 되는 길이의 영화에서 이 같은 음모론들이 모두 명쾌하게 설득력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국의 주류 언론이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아온 수상쩍은 이야기들을 이 영화가 미국의 대중에게 아주 자세히, 그리고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씨 9/11’의 화법에서 가장 인상이 깊게 남는 것은, 2002년의 ‘Bowling for Columbine’에서 보여준 것에 비해 눈에 띄게 겸허해진 무어가 낮은 시선으로 보여주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라크 침공이 개시되기 이전에 연을 날리는 이라크 소년의 모습, 폭격 당한 자신의 집 앞에서 오열하는 할머니, 비참하게 죽음을 맞은 시체들, 그리고 이 무모한 전쟁에 아들을 잃고 배신 당한 애국심의 갈피를 잡으려는 저소득층 여성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이 전쟁의 일선에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민초들의 ‘벼락 맞은’ 현실이 처절하게 와 닿는다.

그 중에서도, 처벌을 무릅쓰고 이라크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는 흑인 사병의 꿋꿋한 저항은, 양심의 물가에 서 있기만 할 뿐 좀처럼 뛰어들지는 못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찌른다.

ABDUL HENDERSON: I will not let my person - I will not let anyone send me back over there to kill other poor people. Especially when they pose no threat to me and my country. I won't do it.

압둘 헨더슨: 나는 내 자신이 – 그 누구도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나를 그곳에 돌려보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 그들이 나와 내 나라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난 그렇게 못합니다.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이 말에서 우리는 이 전쟁의 희생자가 진정 누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게 한다는, 게임의 법칙에 속하지만 잊고 있었던 이 전쟁의 가장 추악한 하위텍스트를 당사자의 시각을 통해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최근 미국의 주류 언론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볼 수 없었던 장면이고, 아무리 귀를 세우고 있어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 아닌가.

그렇다. ‘화씨 9/11’에서 마이클 무어는 이라크 전쟁을 서민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서민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달한다. 무어는 자신이 이데올로그임을 자처하며, 서민적 분노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반전∙반부시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것 저것 재며 전쟁을 오로지 권력운용의 시각에서 보도하고 ‘분석’하는 엘리트 언론들보다 훨씬 즉시성이 있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바라 부시처럼 알량한 ‘뷰티풀 마인드’를 소유한 족속들에게 불편함을 준다면 더더욱 박수를 보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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