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정치ㆍ경제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제일 먼저 거론이 되는 것이 노동자총연맹(노총ㆍCGT)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노총의 역할과 힘은 그만큼 막강하다.
총파업과 과격시위로 악명(?)이 높은 아르헨티나 노총은 후안 도밍고 페론의 집권(1949~76)과 역사를 같이 한다.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은 노총본부 건물 안에는 페론의 체취가 물씬 풍겨난다. 페론이 사용했던 집무실 책상과 의자, 피곤할 때 잠시 시에스타(낮잠)를 즐겼던 침대 등이 카사 로사다(대통령궁)가 아닌 노총본부에 신주단지처럼 모셔져 있다.
<사진> 아르헨티나 노동자총연맹의 상징로고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노동자 천국으로 만든다는 모토 아래 수시로 노총본부에 들려 노동자들의 애로 사항과 부호들의 노동자 착취 사례 등을 청취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아르헨티나 노동법은 노동자들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조항을 담은 것으로 평가됐다. 등 따뜻하고 배부른 황금시절을 보냈던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페론의 사망 이후로 목소리를 낮추고 군사정권시절을 보내야 했다.
페론시절을 갈망했던 노동자들은 1982년 민간정부가 들어서자 각종 요구사항을 봇물처럼 쏟아 놓기 시작했다. 결국 극심한 경제불황과 천문학적인 인플레로 민선 대통령이었던 라울 알폰신은 카를로스 메넴에게 정권을 조기이양하고 물러나게 된다.
페론당 출신인 메넴 대통령은 집권하자 비페론당적인 정책을 구사, 국영 기간산업을 민영화하면서 노조지도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강성 노조지도자들은 비례대표제 국회의원이나 시의원 등으로 진출하게 해주고 노조 안에 파벌을 만들어 서로를 견제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는 각종 기간산업을 인수한 해외 직접 투자가들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에 진출한 포드나 르노, 도요타 등 다국적 기업들이 아르헨에서 노동자들과 별 문제없이 지속적인 확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메넴 대통령의 이 특별법 덕분이었다.
***노총, 집안싸움에 거덜나**
메넴정부가 들어선 뒤로 비교적 온건파인 로돌포 다에르가 정부와 별 마찰 없이 노총을 이끌었다. 그러다 페르난도 델라루아 대통령의 라디칼 당이 다시 집권한 뒤로 전국 트럭운전사 노조위원장인 우고 모쟈노라는 강성 지도자가 다에르 노선에 반기를 들고나섰다.
노총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양분돼 따로 놀게 됨에 따라 자연 노조의 파워는 예전 같지가 않게 됐다. 일반국민들은 노동자들이 자고 새면 벌이는 시위와 노조 지도자들의 밥그릇 싸움에 넌덜머리를 내게 된 것이다.
최근 들어 강성노조가 주도하는 전국 총 파업에 노동자 참여도가 저조한 것이 한눈에 드러나고 있다. 노조는 '지도자 따로, 노조원 따로'가 된 셈이다.
아르헨티나 일반 노동자들은 노조 지도자들을 ‘고르도(뚱보)’라고 부른다. 고르도란 일반적인 애칭이기는 하지만, 이 말 속에는 가난한 노동자가 투쟁을 해서 노조 지도자가 되면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어 호의호식하게 됨을 비아냥거린 뜻도 담겨 있다. 파업천국이라 불리던 아르헨티나에서 노조 활동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이유에는 이러한 지도자들에 대한 인식변화가 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의 위상회복을 위해 쿠데타 방식으로 현 위원장을 몰아내고 지도부를 개편했다.
노총은 당초 오는 8월 10일 새로운 위원장을 선출하기로 돼 있었으나, 14일 모쟈노를 비롯한 강경파 3인방이 다에르에게 집단지도체제 수용을 요구해 다에르가 이에 불응하자 3인이 향후 1년간 공동대표제로 노총을 이끌어가기로 합의함으로써 노총주도권을 전격적으로 접수했다.
***정부도 손 못 대는 피켓테로**
그동안 노조가 집안 싸움으로 맥을 쓰지 못하게 되자 그 공백을 틈타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이 ‘피켓테로’이다. 피켓테로는 피켓을 든 사람, 즉 시위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아르헨 언론은 이를 '실업자시위대'라는 국한된 의미로 못박아 쓰고 있다. 떼를 지어 도로를 차단하거나 공공건물을 점거하는 등의 과격시위를 곧잘 벌이는 실업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실업자시위대'는 실업자연맹이라는 단체가 주도한다. 따라서 피켓테로는 이 실업자연맹을 말하기도 한다.
실업자연맹은 델라루아 대통령 사임사태를 몰고 온 전국 실업자들의 모임인데 키르츠네르 현 정부는 이들에게 한 가구당 약 150페소의 생활보조금을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이들의 요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도로를 점유하고 정부 공공기관 건물의 업무를 마비시키는 이들의 시위를 바라보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부는 말로는 이들의 행동이 불법임을 강조하면서도 원천봉쇄나 강제해산 등의 강력한 대응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경찰은' 강건너 불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날로 과격해지는 이들의 주장은 들어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지난달 파타고니아 지방에서 발생한 탄광 붕괴사고에 대해 사법부가 수사를 해서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다.
***전 스페인주재 아르헨 대사, 현 정부에 쓴소리**
피켓테로가 전임 델라루아 정권을 무너뜨렸고 그로 인해 새 정권이 탄생한 것인 만큼 현 키르츠네르 정부로서는 피켓테로의 족쇄를 차고 태어났다고 하겠지만, 정부가 지나치게 피켓테로에 이끌려 다닌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는 것이 식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오죽하면 아벨 포세 전 스페인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가“아르헨티나는 무정부 상태로 가고 있다”고 했을까. 포세 전 대사는 지난 13일 “키르츠네르 정부는 날로 거칠어져 가는 피켓테로들의 과격시위를 방치해 아르헨티나를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간다”고 쓴 소리를 했다.
일각에서는 포세의 이같은 발언 에 대해 "키르츠네르 대통령이 그의 대사직을 전격경질한 데 대한 분풀이용"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할 소리를 했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아니발 페르난데스 내무장관은 “전직 고위 관리가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라며 "실직자가 된 포세 전 대사가 개인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이해한다"며 포세의 발언의미를 애써 희석시키려 했다. 그러나 연일 도로와 공공건물을 점유하는 피켓테로들의 과격시위가 방치되는 현실은 누구나 포세 전 대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더욱이 이들 피켓테로들 가운데에서 역시 그들 지도자가 구시대 정치인들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 고르도화 돼 간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실업자들이 몇몇 지도자의 정치적인 야심에 이용을 당하고 있고 그로 인해 시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3인3색의 노총과 피켓테로의 지향점이 일치할 것인지 상충할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노조가 체제정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목소리내기에 나선다면 노조와 피켓테로 이중주에 아르헨 사회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합법적인 노조와 불법적인 피켓테로의 시위에서 벗어나 편안한 잠을 잘 날이 언제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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