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근대 자본주의국가의 욕망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근대 자본주의국가의 욕망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변영주 감독의 <화차(火車)>

I. 욕망이라는 이름의 "화차"

사랑은 생성이다. 문호(이선균 분)는 사랑하는 선영(김민희 분)이가 존재함으로 남자가 되고, 선영이는 사랑하는 문호가 존재함으로 드디어 여자가 된다. 그 누군가의 남자가 되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명의 욕망이 만드는 사랑이다. 선영이가 선영이가 아니듯이 문호가 문호가 아니어도 좋다. 그것은 단지 이름일 뿐이지 문호의 선영이나 선영이의 문호가 지니고 있는 몸이라는 생명의 욕망이 지니고 실체가 아니다. 선영이의 실체는 문호가 욕망하는 생명의 몸이고, 문호의 실체는 선영이가 욕망하는 생명의 몸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처럼 생명이 생명이고자 하는 힘이다. 이러한 생명이 생명이고자 하는 힘의 욕망이 가족을 구성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구성한다. 따라서 몸이라는 생명체가 지니는 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욕망은 또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이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욕망의 '오이디푸스'는 '아빠-엄마-나'라는 근대 핵가족의 가족주의적 욕망이고, 라캉이 이야기하는 욕망의 팔루스는 후기 근대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하는 욕망과는 달리 욕망은 살고자 하는 힘이고, 살고자 하는 힘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힘이다. 그 관계는 근원적으로 일대 일의 친구나 연인의 관계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으로 구성된 사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관계는 수없이 다양한 일대일 관계들의 조합이다.

▲ 영화<화차> 중 문호(이선균 분)와 선영(김민희) ⓒ영화제작소 보임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그것이 일본이든지 대한민국이든지 혹은 미국이든지 영국이든지 간에 그 국가 내부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국민이나 시민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문호와 선영이의 사랑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작동하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가족주의가 국가와 사회, 그리고 대학과 가족을 통하여 수많은 문호와 선영이를 자본으로 치환시키기 때문이다. 자본, 혹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와 권력관계로 구성된 가족주의가 문제이다. 변영주 감독과 마찬가지로 <화차>에 등장하는 문호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만드는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그는 선영이가 그의 사랑하는 여자, 선영이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근대 국가의 자본주의와 가족주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선영이가 문호의 선영이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근대 국가의 자본주의와 가족주의는 은행에 다니는 그의 친구 동우(김민재 분)의 이름으로 작동하고 고향에 있는 그의 아버지(최일화 분)의 이름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문호가 형사직에서 쫓겨난 종근(조성하 분)이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선영이를 찾는 과정은 자신과 더불어 일대일 관계의 생산적인 가족을 구성하고자 했던 선영이의 근원적인 삶의 욕망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에 의해서 일그러진 파괴적 욕망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II. 욕망에는 선과 악이 없다

<화차>에 등장하는 선영이는 고아다. 선영이는 또한 언젠가 그녀가 아빠와 엄마라고 불렀던 그 누군가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랑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생산물이다. 따라서 고아의 욕망은 그나 혹은 그녀의 엄마와 아빠가 그나 혹은 그녀를 생산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하였듯이 자신도 관계적 욕망의 생산을 향유하기 위하여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나의 남자이거나 나의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도 남성이 되거나 여성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은 '나와 너'라는 일대일의 관계로 시작하는 것이지 '아빠-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로서의 나는 일대 일 관계로 구성된 아빠와 엄마라는 그 누군가의 생산물이다.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듯이, 혹은 농민이 곡식을 생산하듯이 생산물은 생산자에게 생산의 즐거움을 향유하도록 만드는 것이지 소유의 자본이 아니다. 근원적으로 자본은 생산의 수단이 아니라 교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영이처럼 우리는 모두가 고아다. 엄마와 아빠는 고아인 선영이가 여성이 되거나 남성이 되어 가족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친구나 연인의 일시적인 이름일 뿐이다. 엄마와 아빠는 친구와 같은 엄마이거나 연인과 같은 아빠가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친구와 같은 엄마나 연인과 같은 아빠가 없는 선영이에게 그녀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는 그녀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와 같은 엄마나 연인과 같은 아빠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아버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아빠-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처럼 '국가-정부-국민'이라는 가족주의에 토대를 둔 국가주의의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고아인 선영이를 그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로 만들도록 강요한다. 가족주의의 아버지가 나를 자본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주의의 국가는 국민을 자본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선영이의 삶은 자본으로 치환된 그 누군가의 딸에서 벗어나고 돈으로 인식된 그녀의 몸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탈주의 삶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이 그녀의 몸에 각인되어 있듯이 주민등록번호라는 자본으로 치환된 국민의 이름이 그녀의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녀는 그녀의 삶을 앗아가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그리고 그녀를 끊임없이 자본으로 치환하는 국민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선영'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인 선영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로부터 탈주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누군가와 일대 일 관계의 가족을 구성하기 위한 욕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영이와 같은 모든 생명의 욕망은 자본의 권력구조로 구성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인 동시에 일대 일 관계의 생산적이고 생성적인 고아들로 구성된 또 다른 가족과 국가를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따라서 탈주하고자 하는 동시에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나 혹은 그녀가 속해 있는 가족과 국가에 따라서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 문호의 사촌형이자 전직 형사, 종근 역은 배우 조성하가 맡았다. ⓒ영화제작소 보임

문호는 충북 제천에서 또 다른 선영이의 흔적을 본다. 그리고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소외되어 있는 농촌 아낙들의 의심에 가득 찬 눈빛과 무턱대고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시선으로 낯선 문호를 공격하는 또 다른 선영(선영이의 친구)이와 그녀의 남자를 본다. 그는 미치고 싶다. 그가 속해 있는 가족과 사회와 국가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일대일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만드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선영이의 탈주가 문호 없이는 불가능하듯이 문호의 탈주 또한 선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문호는 마침내 부산과 마산에서 삶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선영이의 실체와 부닥친다. 그러나 그 선영이의 실체는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구성되어 있는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희생물인 동시에 그러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악을 고스란히 닮아버린 선영이이다. 문호는 선영이가 되기 위하여 또 다른 선영이를 죽이고자 하는 선영이의 파괴적 욕망마저도 근원적으로 그녀의 삶의 욕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더 애절하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가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삶의 욕망을 생산적 욕망이 아닌 파괴적 욕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III. 선영이의 탈주선

선영이와 문호가 고아이듯이 우리는 모두가 고아들인 또 다른 선영이와 문호이다. 문호와 선영이가 만나서 상호 일대일 관계의 가족을 만들고자 욕망하였듯이 우리도 일대일 관계의 생산적이고 생성적인 가족을 만들고자 욕망한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는 고아인 선영이가 자신의 생산적인 욕망에 따라 일대일 관계의 가족을 만들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가족, 학교, 기업, 군대, 법원, 정부 등등의 수많은 국가기구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력으로 구성된 '아빠-엄마-나'라는 서열관계의 가족주의로 작동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국민의 친구이어야만 하고, 의사는 환자의 아버지가 아니라 환자의 연인이어야만 하듯이 총장이나 이사장은 아버지가 아니라 교수들의 친구이거나 연인이어야만 하고, 교수와 선생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학생들의 친구이거나 연인이어야만 한다. 국가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가족과 학교 그리고 사회와 기업과 국가가 지배와 피지배의 가족주의나 국가주의의 관계가 아닌 그 구성원들로 구성된 친구관계나 연인관계로 이루어질 때, 선영이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의 욕망은 죽음으로 치닫는 욕망의 탈주선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그 누군가를 생성시키는 지속적인 삶의 탈주선이 될 것이다.

ⓒ영화제작소 보임

그러나 죽음으로 치닫는 선영이의 탈주선에는 분명히 그 무엇인가의 잘못이 있다. 그것은 선영이의 욕망이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의 가족이 아니라 또 다른 가족주의를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영이가 벗어나고자 하는 가족주의가 선영이로 하여금 또 다른 가족주의를 만드는 것이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버린 것이다. 선영이는 가족주의로 치환될 수밖에 없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 속에서 존재하는 문호와의 가족을 구성하기 이전에 또 다른 선영(차수연 분)이나 호두 엄마(배민희 분)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고아들과 친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의 고아들이 모여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고, 기업을 만들고, 그래서 마침내 새로운 국가를 만들 때, 우리의 가족과 학교와 사회 그리고 국가는 가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나 국가가 될 것이다. 문호의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한나(김별 분)와 문호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고 생성시키는 친구관계이듯이 문호가 꿈꾸는 가족이나 병원 또한 가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가족이나 병원이다. 동물 병원이나 동물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 왜 인간의 가족과 사회에서 불가능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근원적으로 친구관계이거나 연인관계인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자본이나 권력을 매개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전환시킨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가족주의와 국가주의 때문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