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큰 손 '싹쓸이'**
이달 초 중국의 보시라이(簿熙來) 상무부장(장관)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중국인 특유의 상술과 대륙적 기질을 유감 없이 발휘, 정·재계와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모으며 통상 실익을 챙겨 갔다.
보 부장은 아르헨티나 도착 일성으로 아르헨티나의 문화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농업대국에 한 수 배우러 왔다'는
자세로 겸손함을 보여 아르헨티나인들의 자존심을 한껏 추켜세워 놓고는 돌아갈 때 "아르헨티나가 섬유제품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옆구리를 찔렀다.
<사진 1> 로베르토 라바냐 아르헨 경제장관(왼쪽)과 악수를 하고 있는 중국의 보시라이 상무장관 @김영길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산업계는 지금 두 조각이 났다. "안정적인 곡물 수출선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 섬유제품
시장의 일정부분을 개방해야 한다"는 농산물 수출업계와 "국내 섬유산업이 초토화될 우려가 있다"며 이에 반대하는 섬유제품 생산업계의 대립양상을 빚어낸 것이다.
그러나 농업의존도가 큰 아르헨티나가 거대한 시장인 중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중국은 올해 아르헨티나산 콩(대두)을 싹쓸이 해 감으로써 아르헨티나가 역대 수출액 최고기록과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중국은 아르헨티나 대두 수출의 86%를 점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아르헨티나 해역에서 잡히는 참조기·홍어·명태 등도 마구잡이로 사들여 가서는 이를 중국산으로 둔갑시켜 한국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는 것은 현지 어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같이 아르헨티나의 농수산물 수입에 열을 올림에 따라 중국은 아르헨티나의 대(對) 아시아 교역 전체물량의 53%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급격히 증대되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에서의 중국의 입지가 그만큼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한국은 식용유와 고급와인, 그리고 약간의 석유화학제품을 수입해 가고 있을 뿐이다.
***한국은 중국 '도우미'인가**
지난주 아르헨티나 외무부의 '산 마르틴궁(宮)'이라는 유서 깊은 한 청사에서 한-중-일 3국 정부 관계자들이 '21세기 한-메르코 수르(남미공동시장) 통상·투자관계의 새로운 전망'이라는 주제로 메르코 수르와 아시아간의 교역증대 방안에 대한 세미나가 개최됐다.
<사진 2> 한ㆍ메르코 수르 통상세미나 개막연설을 하고 있는 아르헨측 대표 에두와르도 시갈 대사, 왼쪽에서 2번째가 한국측 대표 김현종 통상교섭조정관.
한국에서는 김현종 통상교섭조정관을 필두로 한 외교통상부 통상정책팀과 국제경제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아르헨 정부가 주최한 이 경제세미나는 중국의 독점적인 바이어의 입지를 약화시켜 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아니더라도 한국도 있고 일본도 있다'는 것을 은근슬쩍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측의 연사들이 하나같이 오히려 중국의 입지만 높여주는 발언을 했다고 세미나를 주관한 아르헨 외무부의 관계자들은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한국측 연사들은 "한국은 곡물과 과일·채소 등의 자급자족을 이루고 있는 나라"라며 농산물 수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강조하고 "메르코 수르 국가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은 국내 정치상황과 맞물려 오는 2006년쯤에 가서야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는 '한국은 농업국가인 아르헨티나와의 교역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인들 입장에서 보면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중 교역의 수치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한국의 대(對)남미 교역과 투자의 부진은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세미나가 중국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려되는 황사(黃砂) 바람**
그나마 KOTRA 중남미본부장인 우재량 멕시코무역관장이 현지 분위기에 맞춘 내용이라는 평가가 내려져 위안이
되고 있다. 우 관장은 "한국상품이 남미, 특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는 것은 높은 관세
장벽과 대금지불시 이에 따르는 이자부담 때문"이라며 "오는 2005년 한국이 미주개발은행(BID) 회원국이 되면
이런 문제는 다소 해결이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우 관장은 또 "한-아 양국이 통상 전문가 교환제도를 실시하고 양국이 주관하는 상품전시회 등에 대한 참여도를 높이자"고 제안하고 아울러 "메르코 수르 국가들은 교역 방법과 규범 등을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일본은 아르헨티나와의 외형적인 교역수치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도요다의 생산공장을 수도(부에노스 아이레스) 인근에 세워 중남미 시장에서 미국 포드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놓고 있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룰라 브라질 대통령에 이어 키르츠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이달 말 대규모 기업인단을 이끌고
중국을 공식 방문한다. 7일간을 중국에 머물면서 아르헨티나와 중국간의 획기적인 교역증대 방안을 모색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에 불어닥칠 중국의 황사바람이 이곳의 한국 교민들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될지 불안이 앞선다.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미에서 곡물과 원자재를 싹쓸이 하고 있는 중국을 보노라면 머지않아 한국은 남미산 모든 상품을 중국을 통해서 구매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디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 소개**
필자 김영길은 1952년생으로 1986년에 아르헨티나로 이민 갔다.
1995년 한경비지니스 부에노스아이레스 객원기자를 거쳐 1999년부터 아르헨 외신기자협회 집행위원을 맡고 있다.
현지언론에 아시아 관련 패널리스트로. 메르코 수르 통합 국제 세미나(아르헨 -브라질) 패널로도 참여했다.
또한 현지언론에 정치ㆍ경제관련 컬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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