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가비> 포스터 |
그래서 다시 장윤현은 바보다. 영화는 종종 역사, 정치,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거대담론에 적합하지 않은 예술로 인식된다. 사람들은 영화에게서 단순한 오락을 원하며, 하지만 사실상 그 오락이라고 하는 것도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1896년의 아관파천 사태를 기점으로 그 이전, 그러니까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 1897년의 대한제국 선포 등등 당시에 벌어졌던 혼란의 역사를 과연 지금의 그 누가 흥미롭게 바라보겠는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고종의 암살극, 그 가상의 미스터리 드라마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보면 장윤현의 <가비>는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금 이 시대의 트렌드를 무시한, 고전적이고 답답한 작품일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윤현은 똑똑하다. 영화 <가비>는, 일본군에 투항하다 못해 보다 더 잔혹한 킬러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일리치에 대한 사랑과,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지키려 했던 고종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방황하고 슬퍼하는 따냐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큰 우주의 얘기를 전개하는 척, 사실은 한 여인의 순애보적인 연정, 곧 작은 우주의 이야기로 드라마를 전개시킨다. 그녀는 어느덧 한 남자를 흠모하게 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은 그 남자를 죽이려 한다. 한 남자를 살리려면 또 한 남자를 떠나야 하고 떠나려는 남자를 잡으려면 원래 목적대로 다른 남자를 죽여야 한다. 이상은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사랑은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영화가 자꾸 따냐의 우는 모습을 잡아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녀가 자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두 남자 공히 불쌍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너무나 안 돼서, 따냐는 홀로 눈물을 흘린다. 따라서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은 결국 두 남자다. 역사적 대의와 개인의 사랑은 둘 다 숭고한 문제이다. 고종과 일리치가 극적인 만남을 이루게 되는 건 이 대목에서다.
그래서 장윤현은 똑똑한 바보다. 영화 <가비>를 관통하는 정서는 측은함이다. 가까스로 공관에 침입한 일리치는 고종에게 총부리를 겨누지만, 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일리치는 고종에게 소리친다. "나에게 나라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실 나라를 찾는 행위와 같다. 고종은 그걸 안다. 일리치도 그 점을 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매는 점차 촉촉이 젖어 간다. 그건 감정의 과잉이 아니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가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같은 선상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 영화 <가비> 한 장면 ⓒ오션필름 |
<가비>는 볼거리가 즐비한 작품이 아니다. 대신 복잡하고 불투명한, 쇠락해 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고종이 불쌍해진다. 그런 시대에 지독한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불쌍해진다. 그런 시대를 과거의 역사로 갖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불쌍해진다.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런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으며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무엇인가를 꿈꾸며, 여전히 행복해지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바로 그 애처로움이 영화에 담겨 있다.
장윤현은 <가비>를 오락영화로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다. 하지만 장윤현은 <가비>를 잊고 살아가는 역사적 문제와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똑똑하다. <가비>를 지지하느냐 아니냐가, 이 영화를 만든 장윤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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