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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자본이라는 악귀를 벗어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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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자본이라는 악귀를 벗어날 수 없는…

[오동진 칼럼] 변영주의 야심, 한국사회를 향해 날리는 그녀의 표창

8일 개봉하는 <화차>는 이 영화를 만든 변영주 감독의 야심을 실현시키는 작품이다. 한국사회에서 변영주는 늘 올곧은 발언을 해왔던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는 기이하게도 다소 지체 현상을 겪어 왔다. 전작인 <발레교습소>에서 이번 신작까지 그녀는 7년이라는 고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숙성된 인식을 가져왔지만 감독으로서는 '완성체'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야심은 컸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기제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자신의 최고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망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영화 <화차> 포스터 ⓒ영화제작소 보임
영화 <화차>는 많이 알려진 대로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했다. 영화는 대부분 원작의 줄기를 따라가는 척, 상당히 다른 길을 간다. 영화 <화차>와 소설 <화차>는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매우 다른 작품이다.

이야기의 줄기는 한 여자의 실종사건과 그녀를 쫓는 퇴직 형사의 추적과 그 동선 구조로 돼 있다. 여자는 일종의 신용카드 사기범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해 카드를 발급받고, 이런저런 금융거래를 한 후, 갑자기 사라진다. 형사는 처음부터 이 여자의 주변에서 불길한 냄새를 맡는다. 실제로 그녀가 신분을 도용한 누군가는 살해됐으며 그 누군가의 어머니도 실족사로 죽었는데, 사실은 사인이 애매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고사가 아닌 타살의 흔적들이 드러난다.

소설에서의 중심축은 퇴직 형사다. 사라진 여자는 현실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를 찾아 달라고 하는 여자의 약혼남도 존재가 미미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 셋의 캐릭터를 현실 전면에,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동반해서 내세운다. 영화는 삼각 인물 구도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사촌관계인 문호(이선균)와 종근(조성하)은 선영(김민희)의 행적을 뒤쫓는다. 선영은 문호와 함께 그의 집에 결혼 인사를 하러 가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돌연 종적을 감춘다.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갑자기' 없어진 자기 여자를 찾기 위해 문호는 평소 백안시하던 사촌이자 전직 형사인 종근을 찾는다. 둘은 때론 힘을 합하고 때론 갈라서며, 때론 이해하고 때론 갈등하지만 선영의 행적을 조금씩 찾아가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바로 '화차', 곧 연옥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그 둘의 고민, 놀람, 분노, 좌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선영이란 여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영화는 처음엔, 여자의 정체성을 자꾸 묻는 척한다. 문호는 사라진 자기 애인이 원래는 다른 여자였다는 것을 알고 소리친다. "도대체 넌 누구야?!" 도피행각을 벌이던 선영이 문호에게 전화를 했을 때도 무응답인 수화기 건너편을 향해 문호는 또 소리친다. 넌 도대체 누구냐고? 그렇지만 결국 문호, 그리고 종근은 자신들의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의 질문은 점차 '넌 누구냐?'에서 '왜 그래야만 했어?'로 전환된다.

▲ 영화 <화차>에서 배우 김민희는 사라진 여인, '선영' 역을 맡았다. ⓒ영화제작소 보임

소설과 영화가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은 이 대목부터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여자의 정체를 묻는 지점에서 엉거주춤 멈춰져 있다. 소설 속에서는 사라진 여주인공이 7,80년대 일본의 거품 경제가 양산한 극단적 소비구조의 인간형으로 묘사된다. 그녀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이유, 과정이 다소 개인적인 것인 양 추론된다.

하지만 변영주는 바로 그 지점을 한국형 자본주의의 모순의 문제로 진화시킨다. 영화 속 선영이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신분을 도용하고 위장하려 했던 것은 그녀의 지옥 같은 삶이 원인이 됐다. 행방불명된 아버지로부터 악독한 사채 빚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사창가에 팔려가는 등 만신창이의 인생유전을 겪는다. 그녀의 인생에는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자신이어야만 한다면 그녀는 자본의 악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건 자신이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이 될 때에만 가능한 얘기다. 그녀에겐 선택의 수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모든 일이 선영만의 책임인가. 우리는 선영을 동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맹렬히 비난해야 하는가.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주인공 셋은 서울 용산으로 모인다. 선영은 또 다른 범행의 실현을 위해 용산으로 간다.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차린 두 남자는 사력을 다해 용산으로 향한다. 퇴락했다기보다, 타락한 것에 더 가까운 전직 형사 종근이 강변에 차를 버리고 고가 램프를 향해 용산으로 뛰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부분은 짐짓 비현실적이거나 코미디답기까지 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감독의 의도가 분명하게 작동했던 장면이다.

종근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용산이라는 불구덩이 공간으로 냅다 뛰어들어간다.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억누르며 참사를 일으켰던 그곳. 한국의 온갖 천박한 자본의 집합을 상징하는 그곳, 용산. 이 장면에서 변영주 감독이 종종 풀 샷과 부감 샷을 활용했던 것은 하나의 공간, 곧 사회적 구조가 사람의 인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변영주가 용산을 보여준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그리고 탁월한 선택이었다.

<화차>는 일본소설을 모태로 했지만 지금 당장의 우리 사회가 그려내고 있는 표정, 그 우울한 자화상을 포착해 내는 데 성공했다. 우울하지만, 그런 자각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영화 <화차>는 매우 슬픈 영화다.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2시간의 러닝타임을 지내면서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에 대해, 우리 사회에 대해, 전 자본주의적 환경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영화는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고? 그건 분명 개소리에 불과한 얘기다. 영화가 때론 사회적 의미를 포괄하고 그 안에서 뭔가를 획득해야 한다면 <화차>야 말로 바로 그런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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