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와중에 놓여 있는 한국사회에서 <송두율>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잊혀지고 있는가? 그의 귀국이 몰고 왔던 충격파에 비해 오늘날 그가 영어(囹圄)의 몸이 된 현실에 관심을 돌리는 이는 참으로 적다. 사상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각질 두꺼운 무감각의 소산이다.
냉전시대의 독소적 지배 장치인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묶인 그의 처지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좌표가 여전히 넘지 못하고 있는 경계선의 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해왔다는 것이 소모적이고 적대적인 분열을 낳아온 우리 현대사의 모순을, 이제는 청산하고 다음 단계로 가야 함에도 과거의 논리와 법의 주도권은 난공불락(難攻不落)같은 구시대의 파수병이 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냉전시대의 독소적 지배장치**
분단시대의 갈등을 조화로운 통일의 영역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어려운 해외생활 속에서도 치열한 사상적 고뇌를 해온 한 뛰어난 지식인의 인생과 가치는 돌아온 조국에게 이렇듯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다. 송두율은 그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지적되고 있는 북한 노동당 가입, 북한의 자금 수수와 관련하여 당시의 사정을 내세우지 않고 실정법 위반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를 이미 밝혔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이 나라의 법정신과 정치이념은 그의 내재적 이해에 따른 북한체제 연구를 “반체제적 위험물”로 인식하고 있다. 통일의 미래를 내다보는 이 나라 민족 성원이라면 그 누구라도, “상대의 자리에 서보는 내재적 이해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기존질서가 용인하는 “일방적 관점”을 옹호하지 않으면 송두율과 동일한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것은 “정치사상적 이견자”에 대한 탄압과 침묵의 강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국가보안법의 반인권적/반민주적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분단현실이 존속하는 한, 남쪽 체제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일단, 그리고 우선 지지해야 한다는 전제가 담긴 일방적 관점 이외의 것은 법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북한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을 모두 먼저 부정하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어느 하나가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든지 아니면 모두 공멸하는 데까지 가보자는 무서운 상극의 논리이다.
***상대에 대한 내재적 이해를 적대시하는 것은 상극의 논리**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 상대에 대한 절대부정을 통해 남쪽 체제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며, 그 안전이라는 것도 서로가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는 이들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통일 이후에도 그대로 연장하려는 자들의 안전이다.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상대를 점령, 지배하려는 전략의 변형일 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제거해야 할 “체제의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법체계가 기본질서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남과 북의 진정한 대화와 이해의 과정을 위해 노력하는 지적 진실성과 열정은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는 상대에 대한 무지요, 그로 인한 오해와 갈등의 심화이다. 통일의 길은 그렇게 해서 자꾸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두율>의 의의는 너무도 중차대하다. 그것은 이 문제와 관련한 그의 사상적 투신이 무의미한 대립과 소모적인 충돌, 그리고 상극으로 치닫는 상대에 대한 부정을 차단하고, 남과 북의 보다 심화된 정신적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앞서 열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회는 송두율의 그러한 노력과 헌신을 높게 평가하고 그에 기초한 남북간의 내재적 이해의 쌍방성을 심화시키기 위한 작업을 해나갈 일이지, 이렇게 법의 굴레를 그에게 뒤집어 씌워 그의 마음과 육신에 깊은 멍이 들게 하고 비탄의 절규를 할 일이 결코 아니다. 이건 명백한 반문명이다.
송두율의 손과 발을 묶고 그의 입을 봉하게 하는 사회는 기존체제의 논리만 발언권을 가지겠다는 반민주적 사회이며, 인식론적으로 외눈박이 사회이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이 나라의 지적 역량을 빈곤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자, 필요하면 언제든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겠다는 전체주의적 야만의 정치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송두율을 가두는 사회, 자신의 미래를 가두는 사회**
그 정치의지가 법으로 무장하고 있을 때, 그 희생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없이 크다. 일단 걸리면 법의 포박을 벗어나기란 어렵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이 사회는 진실의 전모를 볼 수 없는 철학적 후퇴를 강요당하게 된다. 그 철학적 후퇴는 분단시대 이후의 미래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의 고갈을 뜻하는 것이다.
통절한 마음으로 부르짖는다. 부디 송두율을 옥에서 풀어내라. 분단시대극복을 위한 사상적 모색에 한 평생을 바쳐온 한 지식인을 이런 식으로 가두는 것은 곧 이 나라의 미래를 가두는 것이다. 지식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그의 신체를 수인(囚人)되게 하는 것을 허용하며 침묵하고 있는 사회의 양심은 이미 병들었다. 우린 그런 우리를 이대로 방치하고 말 것인가?
한때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몸담았다는 이들이 허다하게 정치인이 되었는데, 그들은 송두율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 온당치 않다. 무엇을 사리는가?
어느새 6월의 태양이 저만치 떠오르고,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6.15 선언을 하면서 손을 굳게 잡은 날이 다시 다가오는데 바로 그런 현실이 오라고 자신의 생애를 바쳐왔던 한 지식인은 지금 차가운 철장 뒤에서 속히 지나가지 않는 밤을 뒤척이며 가슴을 찢고 있다. 그런데도 우린 그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편안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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