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의원단 대표가 천영세 부대표(61)로 결정됐다. 의원단 대표는 원내대표인 동시에 당내 최고집행기구인 최고위원회의 당연직 최고위원이기도 해 원내외 가교역할을 하게 된다. 최근 당 중앙위에서 당직·공직 겸임 금지결정이 나, 역할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민주노동당은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5월 10일 남원 연수원에서 열린 의원단 총회에서 천영세 부대표가 만장일치 합의로 의원단 대표로 추대됐다"고 밝혔다. 천 신임 의원단 대표는 전노협과 전국연합의 창립을 주도하며 활동해 온 재야운동가로 17대 총선에서 당 선대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총괄했으며, 비례대표 4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향후 우선과제, 이라크파병, 정치개혁, 비정규직 차별철폐, 민생입법 추진**
천영세 신임 의원단 대표는 "처음으로 원내진출에 성공한 진보정당으로서 기성 보수정당과 차별성을 가지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어깨가 무겁다"면서도 "비록 10석의 소수정당이지만 13%의 지지를 받고 진보세력을 대표해서 들어간만큼 노동자·농민·서민을 충실히 대변해 개혁과제를 관철시키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천 의원단 대표는 향후 의정계획과 관련, "교섭단체의 특권을 완화하고 구성 요건을 축소하는 일과 함께 이라크파병, 정치개혁, 비정규직 차별철폐, 상가임대차보호법, 이자제한법 등 민생입법 등을 집중적으로 의제화하겠다"고 밝혔다.
***"민노당 의원들은 철저히 '집단플레이'할 것"**
그는 "민노당 의원들은 모든 상황에 철저히 집단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대응할 것"이라며 "이는 상임위별로 분산되어 의원들이 개별화되기 쉬운 원내정치 구조에서 소수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상임위별로 행해지는 개별의원들의 활동과 함께, 시기마다의 핵심과제에는 모든 원내외 당력을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그는'원내 의원단대표'와 '원외 당 대표'라는 이원화된 구조로 타당과의 협의체계에 문제가 있지 않겠냐는 질문에 "향후 구체적인 운영방안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 천정배 의원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일관적인 개혁을 주장해왔던 것은 높이 산다"며 "원내교섭단체 요건 완화 등 여러 가지 개혁과제들에 대해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것으로 믿고 있다"고 밝혔다.
권영길 대표는 의원단 대표로 나서지 않은 이유와 관련 "통외통위에 배정됐기 때문에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 하지 못할 통일, 농업개방 문제등을 다루려면 몸이 두개라도 부족하다"고 답했다.
***천 대표 별명은 '천 지도'**
이번에 의원단 대표가 된 천영세 당선자는 민주노동당의 '맏형' 역할을 해온 인사로 유명하다.
'천 지도'. 민주노동당원들이 천영세 당선자를 가리킬 때 부르는 별명이다. 전노협 출범 당시부터 민주노총까지 이어온 지도위원이라는 직함이 큰 역할을 했겠지만, 그에 걸맞는 존경과 신뢰가 없는 한 이런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충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60년대 시골청년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만 해도 농민의 자식임에도 "농민이 못사는 것은 게으르고 무식해서"라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3년간의 농사생활은 그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4H라든가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선배들을 비롯해, 서울로 유학갔던 친구들이 가져 온 <사상계>를 통해 그의 이런 인식은 점차 확대했고 인식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낳아 청년 천영세는 66년 고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한맥'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농촌 문제를 연구하던 천영세는 농촌의 저곡가 정책이 노동자의 저임금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급속한 농촌 해체로 도시에 유입된 인력은 곧 저임금 노동자로 편입되었고, 이는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현상이었다.
결국 노동운동으로 투신할 것을 결의한 천영세는 화학노조에서 노동조합 조직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75년부터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노동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며 당시 노조 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아 나갔다. 그러나 화학노조의 활동은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해고되면서 무산되었고, 이후 85년까지 한국노총에서 교육조사, 정책연구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당시 노총이 어용화의 길을 치달으면서 몇몇 상근자들을 해고하자 이에 반발해 사표를 내고 그만 뒀다.
이후 한국노동교육협회를 통해 지속적인 교육활동을 벌이던 그는 90년 역사적인 전노협의 출범을 맞으면서 지도위원으로 추대됐고, 이후 그는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넘어가는 한 길에 70년대 노동운동의 선배로서 80, 90년대 후배들과 굳건히 일선을 지켜왔다.
1997년. 80년대 말부터 제기된 진보정당론이 그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권영길 대표와 더불어 전국연합과 민주노총 내의 많은 이견을 조정해내며 '국민승리 21'을 결성, 결국 현재의 민주노동당의 기초를 닦았고 지난 4.15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진출의 꿈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약력
1943년 생
1970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1971년~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
1973년~77년 한국노총 화학노조 기획실장
1974년~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산업사회교육위원
1979년~85년 한국노총 정책위원
1986년~89년 한국노동교육협회 사무국장
1990년~95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상임지도위원
1992년~97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공동의장
1997년 국민승리 21 권영길 대통령 후보 선대본부장
2000년~2002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1995년~현재 민주노총 지도위원
2000년~현재 통일연대 공동상임대표
2002년~현재 민주노동당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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