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 지난 4년 동안의 교장 임기를 마친 김삼진 선생님의 이임식이 있던 날,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김삼진 선생님은 처음 부임했을 때처럼, 한 명 한 명의 아이들과 포옹을 나누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남은 교사들을 대표해서 김영식 선생님의 송사가 있었다. "… 덕양중의 교사들은 교장 선생님이 깔아 놓으신 멍석 위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교육적 이상을 펼쳐내며 조금씩 성장해 갔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나는 교사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웃고 있습니다. 이 곳 저 곳 학교들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신음 소리가 덕양중에서는 적습니다. 없다고는 말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크지 않습니다. 방학이 싫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학교가 환영받고 있습니다. 덕양중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이제 경기도 교육에서, 그리고 대한민국 교육에서 그 자체로 전설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
사람들에게 덕양중학교가 지난 4년 동안 걸어온 발자취와 바로 지금 진행되는 모습을 이야기해주면 "놀라운 반전"이며, "세계적으로 검증된 독일의 학교나 핀란드 학교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며, "탈학교론자들도 이런 학교의 출현에 어안이 벙벙할"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덕양중학교와 같은 아름다운 기적과 연합이 전국 곳곳에서 많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한다.
▲덕양중학교 국어 공개수업 장면 ⓒ신윤철 |
'부적응' 교사와 아이들의 도전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덕양중학교는 서울특별시와 인접한,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에 있다. 인근에는 육군 ○○기계화보병사단과 한국항공대학교가 있다. 이 지역은 오래 동안 개발제한구역으로 규제를 받아왔으며 지금도 여러 규제를 받고 있다. 주변에는 병의원이나 약국조차 없다. 일산보다도 서울 도심에 훨씬 더 가까운 곳이지만, 사람들은 이곳에 학교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한 때 18학급이었던 덕양중학교는 2007년도에 6개 학급으로 줄었다. 교사들은 어떻게든 전근내신을 써서 학교를 떠나려 했다. 아이들은 어떤 날은 한 반에 7~8명이 출석하지 않을 정도로 학교 다니기가 싫었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고, 교무실에서는 공공연히 체벌이 이루어졌다. 수업에서는 아무리 교재를 철저히 분석하고 수업안을 세밀하게 준비하는 교사도 '부적응 학생'이라는 표현처럼 '부적응 교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곳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자신의 환경에 잠들어 버렸다면, 덕양중학교는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위기를 겪으면서 성장해간 '대화의 시간'
덕양중학교가 4년여 전에 교장공모제를 실시하여 첫 발을 내딛었을 때만 해도 덕양중학교가 지금 여기까지 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2007년 학교운영위원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교장선생님과 학교운영위원장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교장실 교장선생님 의자를 비싼 것으로 새로 교체한 것이 발단이었다. 학교운영위원장이 이것을 문제 삼았고, 교장선생님의 과도한 체벌 문제로 번졌다. 학부모의 민원이 교육청을 비롯해 여러 곳에 제기되었다. 교육청의 중재로 교장선생님이 사과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학교의 분위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그러나 여기서 교감선생님의 제안으로 교장공모제를 통해 학교가 교장을 선출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교장 공모를 통해 학교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서는 기대와 회의가 교차했지만 학교 구성원들에게는 변화에 대한 절실함이 더 컸다.
덕양중학교는 내부형 공모제를 통해 평교사 출신 김삼진 선생님을 교장으로 선출하게 되었다. '지역사회와의 네트워크', '재미있는 학습, 즐거운 학교', '학생들의 학습에 책임지는 학교', '교사 학습공동체 강화', '참여와 소통의 공동체' 다섯 가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항공대학교 등과 MOU를 맺어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매주 정기적인 교사 전문화 연수를 실시했으며, '협동학습'을 통해 모둠별 수업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2009년이 되자 특수학급이 만들어지는 것을 계기로 모든 반들을 버들치반, 갈겨니반, 쉬리반, 후투티반, 호반새반, 금강송반, 백송반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효과를 보기도 전에 시련이 먼저 찾아왔다. '협동학습'은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경쟁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높이기 위해서 시도한 것이었으나 모둠들 사이에 경쟁이 과열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교사들이 숙련된 방식으로 적용하기에도 너무 많은 시간과 기법을 요구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지적인 탐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았고, 이를 위한 행정적 절차로 교사들의 업무는 더욱 늘어났다. 매주 이루어지는 전문화 연수도 교사들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시행하는 '일제고사' 결과 '학력향상중점학교'로 지정되었다. 교과부는 특별감사를 할 수도 있다는 경고성 공문을 내려 보냈다. 덕양중학교는 혁신학교에 도전도 하기 전에 링 위에 수건을 던질 수도 있었다.
▲ 수학신문 ⓒ신윤철 |
바로 이때 2009년 여름 교사들은 두 가지 새로운 시도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나는 경기도민들의 직선으로 선출된 김상곤 교육감의 혁신학교 정책을 받아들여 혁신학교에 지정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존의 교사 전문화 연수 계획을 취소하고 자발적인 교사 학습공동체를 구성한 것이다. 2009년 2학기부터 덕양중학교의 연수 프로그램은 교사들의 자발적인 제안에 따라 계획되고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방학 중에 교사들 모두가 참여하는 워크샵을 통해서 1년 또는 한 학기 학교의 사업과 운영계획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교사역할훈련 등 상담과 관련된 전문화 연수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고, 교무실에서는 학습과 토론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교사들은 관리자의 지시나 제안이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학교 발전을 위한 기획안을 내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하여 학교도서관 글마루, 상담실 WeeClass가 만들어졌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배움의 공동체
이러한 시련과 위기의 과정을 겪으면서 덕양중학교 교사들은 일본 '배움의 공동체' 탐방을 계기로 뜻을 모아 2011년 1학기부터 수업에 배움의 공동체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협동학습'을 적용할 때 있었던 모둠들 사이의 경쟁, 모둠 내부에서 사전에 정해진 역할 분담 등을 없애고 주제-탐구-표현을 통해 수업 전체를 대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동료 교사들 사이에 일상적인 수업 공개와 외부 참관인들을 포함하는 매주 정기적인 공개수업 및 연구회의를 통해 이러한 과정을 교사들 및 지역사회와 공유해가고 있다.
2010년도에 사회 선생님이 처음 이러한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적용하기 시작했을 때 교감선생님, 수학선생님, 도덕선생님 등은 '이것이 과연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이 많았다. 2011년에 복직한 국어선생님도 비슷했다. 작년 1학기에 아이들은 수업 중에 책걸상을 옮기는 것이 불편하고 모둠에서 자기가 뭘 해야 하는 것인지 막연했다.
그러나 수업 공개가 일상화되고 공개수업과 연구회의가 거듭될수록 선생님들과 아이들 모두 수업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으며 순간순간 배움의 도약을 성취해갔다. 도덕시간에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구명보트에 탄 4명의 선원'에 관한 주제로 한 시간 내내 토론하면서 도덕 추론과 판단을 학습하고, 수학시간에는 도수분포표와 히스토그램을 이용하여 FC바르셀로나와 맨체스터유나이티드를 분석하는 수학신문을 제작하고, 기술가정시간에는 비전탐구와 직업체험을 위해 대학교, 미용실, 용산전자상가, 남대문시장, 어린이집 등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작년 3월 일본 대지진 피해 성금 모금함에는 2만원, 만원, 오천원이 들어오고, 크리스마스씰이 나오면 금새 다 팔려 나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기 내면에 있는 바람을 다른 친구들 및 어른들에게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 학교 밖에 있는 다양한 국적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내 말'도 '나'도 기억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보상의 시간'과 어른들의 숙제
핀란드의 교육개혁은 30년이 걸렸다. 그런데, 덕양중학교는 30년 동안 잠들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4년만에 커다란 성장을 이루어내고 있다. 덕양중학교 교사들이 같은 세계관을 갖고, 같은 교원단체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교사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공통분모를 재발견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갔다. 또한 이우학교, 장곡중학교와 같은 앞선 시도와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일본 '배움의 공동체'나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배움의 공동체를 위한 운동들도 도움을 주었다.
덕양중학교가 4년 동안 이룬 도약은 그들과 함께 '우리가' 공교육을 개혁하는 길에서 만난 이정표이다. 이 "아름다운 기적과 연합"은 지금 이 땅에서 계속 퍼져나가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