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술의 社會學的 巡禮**
언론계 친구 가운데 전날의 만석꾼 집안 사람이 있다. 그는 술과 음식에 대해 대단히 박식하고 매우 까다롭게 골라 먹고 마신다. 예를 들어 생선회는 고급식당의 경우 예외적으로 먹기는하나 대개는 안 먹는다. 아마 일본 영향으로 회가 유행되었지 옛날 명문집안에서는 익힌 것 말고는 안 먹었던 모양이다. 그가 나의 술에 관한 청탁불문에다가 안주의 잡식성임에 대해 혀를 차게 된 듯 한번은 "출신성분이..." 하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하기는 중의 중 정도 집안 출신이니 말은 맞다.)
경주 최부자집 하면 언론에 자주 소개되고 책도 나와 잘 알려져 있다. 9대나 만석꾼 집안을 유지했으니 대단하다. 그 집안의 가훈 가운데 좋은 게 많은데,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라, 인근 십리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등은 귀 기울일 만하다. 그 집안 종손인 수당 최염(修堂 崔炎)씨와 술친구가 되어 자주 만나는데 역시 집안의 가풍이라 할까 품격이 있다. 우선 술자리가 매우 부드럽다. 가끔 까페에 고급양주를 맡겨놓고 봉사료만 두둑이 주는 식으로 술을 즐기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오래 한 조덕송씨가 청운각 등 고급요정 초대를 받고는 끝난 후 꼭 대포집에 가서 한잔 하며 "어, 이제 술 마시는 것 같군"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소설가 이병주씨는 광화문께 일식집 <신원>의 스탠드에서 간단히 회와 청주를 하는 것으로 그날 밤의 술행각을 시작한다. 칼럼니스트라고 아마 처음으로 명함에 찍고 다니던 언론인 심연섭(沈鍊燮)씨는 프레스클럽이나 반도호텔의 스탠드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는 그곳을 OP(옵서베이션 포스트)라고 명명한다. 거기서 관망하다가 다음 코스를 정한다는 뜻이다.
광주 광산구에서 알아주는 고급음식점 <예향>에서 동아일보 정치부장과 국회의원을 지내고 그곳 신문사장으로 있던 이상하(李相河)형이 고급양주를 한턱 썼다. 거기서 발동이 걸린 나는 이형에게 "우리 신문기자식으로 한번 마시자"며 광주 중심부 대포집을 멀리까지 찾아가 막창구이로 통쾌하게 마셔댔다. 역시 출신성분인가.
일본 마이니찌신분(每日新聞)의 요시오까(吉岡忠雄) 특파원이 귀국한 후 내가 일본에 간 기회에 대포집 순례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변두리의 <이와데야(岩手屋)>로 데리고 간다. 이와데 껭(縣)은 말하자면 일본의 한촌(寒村)지대이다. 따라서 특색있는 안주는 고사리, 가재 같은 소박한 것이다. 술은 청주를 큰 통에서 따라주고.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거기서 그곳 출신의 시인 이시가와 다꾸보꾸(石川ꟓ木)를 화제 삼았다. 그는 우리나라의 김소월에 비견되는 일본의 국민적 시인인데 서민생활에 뿌리박은 소박한 시가 심금에 와닿는다.
그후 안 것이지만 이시가와 시인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ㆍ병탐하자 마음이 아프고 슬퍼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는 것이다.
"지도의 위
조선국에 빙글 빙글 돌려
먹물을 바르며 가을바람을 듣는다"
(地圖の 上
朝鮮國に くるぐると
墨を ぬりつつ 秋風を 聞く)
그 다음 요시오까가 안내한 곳은 산께이신분(産經新聞) 오까사와(岡澤) 특파원의 단골인, 도심의 지붕밑 방에 있는 스낵. 영화예술인들의 '웅덩이'(溜라고 쓰고 다마리라고 읽는 유유상종 모이는 장소를 말하는 일본식 표현)라는데 벽면이 온통 영화스틸이고 양주와 스파게티를 내놓는다.
나는 그런 식의 술집 행각을 사회학적 순례(sociological tour)라고 작명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일본방문시 고이즈미 총리와 이사까야(居酒屋)에서 한잔 하며 의견을 나누었다고 보도되었는데 부시가 다른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것 하나는 신통하다. 이사까야는 우리나라의, 포장마차는 아니고, 수준이 있는 대중적 술집과 같다. 그 위가 갑뽀우(割烹)이고 고급이 요정이다.
구태회(具泰會) 의원 일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자민당의 정조회장(정조회장은 총무회장, 간사장과 함께 당3역이라 한다) 초청으로 아까사까미스께(赤坂見付)에 있는 고급요정 시미즈(淸水)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일본 보수정치가들은 요정정치를 한다고 하는데 그 무대이다. 일본에 독특한 게이샤(藝者)는 음악 노래 춤 등 여러 가지 예능에 능한데 그러다보니 대개 나이가 들어 그 날은 모두 40, 50대로 짐작되었고 나같은 주당에게는 일본요정이란 데가 "별로"였다. 근래 미국에서 게이샤에 관한 훌륭한 책이 나와 논란도 되고 관심을 끌고 있는데, 한국 기생과 유사한 데가 있으나 한국의 경우는 전통이 거의 사라지고 일본은 아직 전통을 고수하고 있어 고급인 관광상품화도 되고 있다.
거기서 나와 2차로 좀 싼 요정으로 갔는데 요정이라기보다는 일본요정식 까페 같았다. 음식은 1차에서 많이 들었으니 삶은 줄기콩 같은 간단한 것이 나왔고 마지막에 오짜스께(御茶채)라고 공기밥에 더운 차를 따르고 김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가 나온다. 다만 잊을 수 없는 것은 단골 일본의원들이 들어가니까 여주인이 현관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오가이리 나사이(어서 돌아오십시오)" 하고 인사를 하던 모습이다. "이랏쌰이마세(어서 오십시오)"가 보통이다. 그런데 "어서 오십시오"가 아니라 마치 가족을 맞이하듯 "잘 돌아오셨습니다" 하는데 당길 맛이 있다.
캐나다 여행시 오타와에서 술집을 찾으니 마땅치 않다. 나이트 라이프(night life)가 신통치 않다는 그곳 사람의 설명이다. 호텔의 술집은 전세계 공통이라 신기할 게 없고 할 수 없이 근처의 아주 간단한 맥주집으로 향하였다.
친구들이 연극을 보러 가자기에 나는 혼자 떨어져 우리식으로 말하면 버라이어티 쇼 하는 데를 갔다. 나는 그것도 사회학적 순례라고 내세웠는데 한 미국 친구는 "버더빌(vaudeville)의 왕자"하고 놀리고 그의 부인은 내 순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미 대사관의 버그하르트 부대사는 평화봉사단 출신이 대개 그렇지만 구수털털하다. 그를 사회학적 순례를 시킨다고 교보빌딩 뒤 빈대떡집으로 끌고 간 이야기는 이미 쓴 바 있다. 그는 그때 빈대떡집에 들어가며 "나의 신분을 밝히지 말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나와서는 "이제 신분을 밝혀도 좋다"고 푼다. 미국 외교관의 행동준칙인 것 같다.
60년대말 조총련계에 가까운 일본 언론인이 왔었다. 가나자와(金澤)시에 있는 혹꼬구신분(北國新聞)의 가도다(門田) 논설위원으로 기억하는데 그곳 이시가와(石川)현이 동해에 면해 있어 북한과의 왕래가 많고 따라서 조총련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역시 대응은 사회학적 순례다. 한두군데 들렀다가 명동의 젊은이들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엘렉 기타의 소음에 가까운 음악, 어지러운 조명, 그리고 젊은이들의 춤을 추는 열기. 순례를 마친 가도다씨는 "남조선이 반드시 암흑사회만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는데, 얼마나 조총련계가 철저히 입력을 시켰는지 놀라운 일이었다.
파리에서 2주일쯤 묵을 일이 있었다. 동아일보 특파원 장행훈 박사가 라틴 쿼터의 팡테옹 뒷골목의 해산물을 주로 하는 집으로 안내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청진동과 비견된다는 느낌이고 마음에 들었다. 굴ㆍ조개ㆍ성게 등을 푸짐하게 준다. 거기다가 서민적인 테이블 와인을 들면 비싸지도 않다. 서울의 일식집보다 싸다는 계산이다. 오래된 골목의 분위기도 좋고 찾기도 쉽고 하여 파리 있는 동안 다른 곳 순례를 단념하고 그곳만 다녔다.
그런데 유유상종이라던가. 일본 속담에 "뱀들은 같은 구멍을 좋아 한다"고 하던가. 파리가 넓은데 하필이면 거기서 젊은 애인 동반으로 행각하는 소설가 이병주씨를 마주쳤다. 주당들의 감각은 같다고 해야 할까. 먼저 자리를 떠나는 나를 이병주씨가 쫓아와서는 "서울 가서 나 여기서 만났다고 말하지 마." 프로답지 않다.
요즘은 젊은 기자들과 어울리면 가끔 졍육점이 운영하는 불고기집에 간다. 그냥 불고기가 아니다. 정육점이기에 소주에 서너가지 고기를 먹는 재미가 있다. 순서가 중요하다. 빨리 익는 차돌박이가 첫 순서이고, 가장 맛이 있는 삼겹살이 마지막이며, 중간에 등심 목살 등이 들어간다. 삼겹살을 기름이 쏙 빠지게 잘 구우면 그게 서양사람들이 좋아하는 베이컨이 아닌가.
내가 정치할 때 선거구와 관련하여 잘 아는 사업가는 몇 명 안 되지만, 그 중 두 사람은 교과서에 실릴 만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모자왕으로 유명한 영안모자의 백성학(白聖鶴) 사장은 로 햄(raw ham)을 즐겨 먹고 그것이 몸에 좋다고 적극 권한다. 여하간 햄이니까 그것도 돼지고기다.
목포에서 제일 큰 신안비치호텔을 갖고 있는 신안건설산업의 우경선(禹炅仙) 사장을 따라 가보았더니 세발낙지를 짚에 둘둘 말아서 양념하여 익힌, 세발낙지 꼬치를 별미라고 권한다. 여기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요주의. 발이 셋이라 세발이 아니라 세(細)라는 한자와 발이라는 우리말의 묘한 합성어다. 거기다 신선한 병어회. 맛이 고소하니 좋다.
결론하면 나는 잡식성의 "출신성분"이라 할 것이다. 흔히 말하는 막걸리타입이다. 요즘은 소주타입으로 말을 수정해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역시 사회학적 술 순례도 즐겼고 따라서 인생도...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