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다 보면 ‘색맹사회(color blind society)’라는 표현을 종종 듣게 된다. 사람들이 색맹환자처럼 피부색을 아예 구별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말이다. 백인들이 일구어 놓은 국가적 토양에 뿌리를 내린 인종간의 갈등이 워낙 심각하다 보니, 이런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개념까지 유통되게 된 것이다.
최근 들어 공화당의 득세에 힘입어 ‘affirmative action(소수계 우대고용ㆍ평가)’을 폐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기득권층 백인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별안간 색맹사회의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는 것은 희대의 아이러니에 속한다. 이 개념에 대한 개개인의 주장이 어떠하든, 미국사회에서 인종관계, 특히 흑백관계의 문제가 고질적인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인종문제의 지뢰밭인 미국사회의 중심에 뇌관처럼 자리잡고 있는 단어는‘nigger’라는 단어다. 함부로 다루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단어다. 4백년 동안 흑인에 대한 폭압의 어휘를 대표했던 이 단어는, 20세기에 흑인들이 마침내 법적으로나마 평등시민의 지위를 쟁취한 후 양지에 있던 인종차별이 음지로 숨어 들어가면서, 단순한 “깜둥이”라는 욕설의 차원을 뛰어넘은 저주와도 비슷한 파괴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nigger’라는 단어는 가족이나 아주 친한 친구들이 아니라면 타인이 있는 자리에서 입밖에 내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말이다. 이 한마디는 미국인들이 즐겨 쓰는 ‘chink’, ‘jap’, ‘kyke’(유대인), ‘spic’(라티노) 등 타 인종을 경멸하는 수많은 단어 중에서도 단연 가장 무서운 폭발력을 갖고 있다.
이 단어를 응징의 염려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층’이 있다면, 그건 흑인들 자신이다. 현대 미국사회에서는 흑인들만이 타인을 그렇게 부를 자격이 있다. 실제로 수많은 흑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더 이상 대놓고 nigger라고 부르지는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현실을 조롱하듯, 서로를 nigger라고 자연스럽게 부르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가 흑인임을 잊지도 말고 그들이 우리를 멸시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는, 정체성과 불의를 확인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어떻게 보면 ‘nigger’라는 단어의 주인은 흑인이다.
‘Nigger’의 변형어인 ‘nigga’라는 신종어도 있다. 시초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신세대 흑인들은 ‘nigger’라는 단어 대신 ‘nigga’를 즐겨 쓴다. ‘Nigger’라는 단어에 수백 년의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의 무게가 그대로 실려있다면,‘nigga’는 그런 역사와의 단절을 선언하듯 내뱉을 때의 호흡이 짧아 어감이 깔끔하고, 새로운 시대에 도전하는 태도를 담은 의미가 있다. 수년 전 힙합세대의 주 용어로 유통되기 시작한 이 단어는 ‘임마’ 또는‘짜식’과 같은 애칭 쯤으로 쓰이는데, 1990년대 초반에 힙합세계를 주름잡았던 흑인 래퍼 투팍 샤쿠어(Tupac Shakurㆍ96년 저격 사망)는 ‘nigger’와 ‘nigga’ 두 단어의 차이를 이렇게 정의했다.
NIGGER: A black man with a slavery chain around his neck.
(목에 노예의 사슬이 걸려있는 흑인)
NIGGA: A black man with a gold chain around his neck.
(목에 금 체인 목걸이를 하고 있는 흑인)
즉 nigga라는 말은 살아가는 자세를 표현하는, 다시 말해 사회가 부여하는 흑인의 사회적 지위보다는 인생을 대하는 어떤 ‘흑인적 태도’를 반영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뒤집어서 말하면, nigga의 원형인 nigger라는 단어는 아직도 그 역사와 사회적 의미의 무게를 털어버리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Nigger는 같은 흑인이 나를 그렇게 불렀다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다.
천재 영화쟁이 퀜틴 타란티노의 출세작 ‘펄프픽션(Pulp Fictionㆍ1994)’은 그 위험한 nigger라는 단어의 사용에 관한 불문율을 의도적으로 깬 작품이다. 영화는 이 단어를 비슷한 형태로 족히 열 댓 번은 남발하면서, 타란티노의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이 단어에 대한 그의 집착을 뚜렷하게 나타내 준다. (그가 단독으로 쓴 첫 시나리오인 ‘True Romance’[1993]에서 주인공의 아버지인 클리포드 월리[데니스 호퍼]가 처형을 눈앞에 두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시실리인 흑인조상설’에서도 nigger라는 단어에 대한 집착을 볼 수 있다.)
타란티노는 이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 바 있다: “Nigger라는 단어는 아마도 영어에서 가장 휘발성이 강한(the most volatile) 단어일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처럼 위험한 단어는 지붕 위에 올라가 큰소리로 외쳐 그 위험성을 제거해야 한다.” 나쁜 말일수록 가능한 한 헤프게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희석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펄프픽션’의 대사의 곳곳에 뿌려져 있는 nigger의 사용형태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말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 즉 인종차별의 의미가 제거된 채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흑인을 경멸하거나 인격을 모독하기 위해 쓰이는 말이 아니라, 영화의 대사를 장식하는 nigger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 강도(强度)에 있어서 ‘놈’ 정도를 의미하는, 독기가 빠진 표현으로 와 닿는다.
세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1. 불특정 인물을 지칭
마셀러스(빙 레임스 분): [백인 부하로부터 복서 부치 쿨리지(브루스 윌리스)가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고] I'm prepared to scour the earth for this motherfucker. If Butch goes to Indo-China, I want a nigger hidin' in a bowl of rice, ready to pop a cap in his ass.
(이 [번역 생략]를 지구 끝까지 가서 찾아낼 준비가 돼 있네. 부치가 인도차이나로 간다면, 밥그릇 속에라도 누가 숨어있다가 그 놈을 쏴버리게 하도록 하게.) [곁가지 설명: 여기에서 ‘cap’이란 화약이 들어있는 딱총 cap에서 나온 말로 총알을 의미한다. 그리고 ‘ass’란 이런 경우엔 엉덩이라는 신체 부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his ass’가 한 단위로 묶여 ‘그 놈’이란 뜻을 갖는다. 첫 장면에서 “threw his ass over the balcony”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역시 “그 놈을 발코니에서 내던졌다”는 뜻이다.]
2. ‘깜둥이’라는 뜻
지미(타란티노): [쥴스(사무엘 잭슨)와 빈스(존 트라볼타)가 실수로 쏴 죽인 젊은 흑인의 시체를 차에 싣고 나타나자]
Did you see a sign out in front of my house that said, ‘Dead Nigger Storage’?
(우리 집 앞에 ‘죽은 깜둥이 보관창고’라고 적혀 있는 사인을 보기라도 했나?)
3. ‘그 놈들’을 지칭
마셀러스: [쥴스와 시체처리 문제를 놓고 전화통화 중] Go back in there, chill them niggers out and wait for the Wolf, who should be comin' directly.
(다시 들어가서 그 놈들 안정 시키고, 이제 곧 나타날 울프를 기다려.)
위의 세가지 사용형태만 놓고 봐도, nigger라는 단어가 인종차별의 폭발적 의미를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2번에서 백인인 지미가 오발로 살해된 흑인 마빈(Marvin)을 두고 nigger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죽은 껌둥이 보관창고’를 되풀이하며 호통치는 그의 모습에는 악의가 없다. 게다가 그는 흑인인 쥴스와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그 대목에서 하등의 인종차별적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nigger란 문제의 시체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일 뿐, 이 단어가 갖는 하위텍스트는 없다고 봐야 한다. 또 1번과 3번의 경우에는, 대상이 백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에 비추어, 그리고 이제까지 타란티노 작품들이 보여준 흑인 캐릭터들의 정성스런 묘사(재키 브라운, ‘킬빌’ 1부의 버니타 브라운 등)에 비추어, 그에 대한 인종차별 혐의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가 한때 마가렛 조와 사귀었다는 것도 하나의 참고 사항일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인종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의 의도대로, ‘펄프픽션’에서의 nigger의 무차별적 반복은 그 의미를 희석시키는 효과를 달성한다.
초현실적 폭력과 함께 ‘펄프픽션’이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초현실적 색맹사회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범죄적 마인드를 갖고 인생을 사는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만은 기이하게도 그들의 부도덕한 언행의 목록에 들어있지 않다.
그들이 입주해 있는 세계는 진정한 색맹의 세계이며, 그들은 모두 피부색에 개의치 않고 갈등도 부담도 없이 섞여있다. 흑인인 두목 마셀러스의 부인(우마 서먼)은 백인이고, 그가 거느리는 똘마니 중에는 백인인 빈스가 있다. 백인인 빈스는 흑인인 쥴스와 한 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제4장(‘Jules, Vincent, Jimmy & the Wolf’)에서 ‘죽은 껌둥이 보관창고’라는 표현을 쓰며 쥴스에게 호통치는 지미가 나오는 장면들을 자세히 뜯어 본 사람이라면 잠깐 뒷모습만 보인 그의 부인(야간근무를 하는 간호사)이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는 디테일을 기억할 것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이러한 디테일에서까지 단역배우의 피부색을 챙겼다는 것은 타란티노가 인종문제에 대한 나름대로 철학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에서 타란티노가 인종문제를 응시하는 방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흑백의 이 같은 섞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간접적으로나마 인종문제를 ‘색맹’의 입장에서 다루려 하는 타란티노의 취지는 높이 사야 마땅하다. 다만 기억해둘 것은, 그의 영화 속에서 튀는 피가 스크린 바깥으로 흘러 나오지 않듯이, 그가 그리는 색맹의 사회는 현실로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아울러 기억해야 할 것은, 흑인과 백인이 아무런 문제없이 섞여 있다고 말하는 ‘펄프픽션’의 배경인 로스앤젤레스는 92년 4월 52명의 사망자와 2천5백명의 부상자를 낸 인종폭동의 현장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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