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12일 MBC에 대한 법적대응을 밝힌 데 이어 13일자 신문 6면 전체를 활용해 MBC의 보도를 조목조목 반박한 것과 관련해, MBC 보도제작국의 최형문 기자가 반론 글을 보내왔다.
프레시안은 최 기자가 이번 문제의 발단이 된 <시사매거진2580>의 담당 기자였다는 점을 감안해 이를 가감 없이 원문 그대로 싣는다. 프레시안은 이후 조선일보의 반론이 있다면 이 또한 소개할 계획이다. 편집자주
***조선일보의 ‘무서운 편파’**
조선일보가 13일자에서 11일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이 왜곡했다고 지적한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착각이라면 무서운 착각이고 이것마저도 <2580>을 비판이 아닌 비난하기 위해 일부러 왜곡했다면 이제 조선일보에 대해 마지막 남아있던 ‘그래도 그들도 언론인일 것’이라는 내 순진한 희망을 버려야겠다.
조선일보가 하듯이 조목조목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는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본지에서 내보낸 ‘노무현-이회창 후보 이것이 다르다’는 제목의 시리즈… 이날 <2580>이 보도한 내용은 2002년 대선 당시 ‘안티조선’ 세력이 중심이 된 ‘대선미디어공정선거시민연대’에서 문제 삼고, ‘친노 매체’들이 확대 전파시킨 내용을 여과 없이 다시 보도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이 두려워 쫓기는 듯한 심정으로 기사를 썼는가? 참 싫어하지만 ‘조선일보식’으로 말꼬리를 잡아보자.
그 시리즈의 제목은 ‘노무현-이회창’이 아니라 ‘이회창-노무현’이었다. 아무리 기억력의 한계가 존재한다 해도 불과 2년 전 자신들의 지면에 나갔던, 또한 분명 신문의 형태로 남아있을 제목조차 혼동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면 두 후보의 이름 순서를 바꿔치기 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졌던 의도를 숨기려 하는 것인가? 이 정도로 하자. 팩트로 승부해야 할 기자로서 그런 식의 말꼬리 잡기는 스스로의 얼굴을 깎아먹는 일 일 테니까 말이다.
자, 그럼 이제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10회에 거쳐 이 비교시리즈를 실었다며 친절하게도 도표까지 곁들였다. 나도 안다. 조선일보의 그 방대한 지면을 며칠 밤을 새우며 분석하면서 최소한 그 비교시리즈가 몇 회에 걸쳐 연재됐는지를 몰랐겠는가? 자신의 상식으로 남을 재단하지 말라. 기사에서 문제 삼았던 것은 ‘정치스타일’ 비교였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와 <바람 일으켜 단판 승부>라는 소제목이 붙여진 기사를 비판했음은 친절하게도 내 기사를 다시 보는 수고를 조금만 해주었다면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난 기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 많은 과거의 기사와 기사 평들을 들춰가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아냈다.
***표**
이회창 후보는 부정이 ‘0’, 노무현 후보는 긍정이 ‘0’이다. 심하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자. 후보의 정치 스타일을 비교하면서 이처럼 심하게 다른 시각, 다른 표현으로 쓴 기사를 독자들에게 읽기를 강요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뻔하지 않은가? 그래도 모르겠다면 기자로서의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왜 한 사람은 “동기보다 5년 빨리 대법관이 돼 13번의 소수의견을 냈다”와 “한 사람은 판사 임용 8개월 만에 변호사를 개업해 주로 돈 되는 조세소송을 맡았다”라는 부분을 비교한 것은 문제 삼지 않는가? 그 어떤 비틀기로도 해명할 수 없는 편파의 냄새가 짙게 풍겨서인가?
***조선일보는 분명 ‘킹메이커’가 되려 했다**
“두 번째는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의 ‘IMF 재협상’ 관련이다. <2580>은 ‘김대중 후보가 IMF 재협상론을 제기하자 조선일보가 비판했지만, 재협상론을 먼저 꺼낸 것은 조선일보였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1997년 12월 2일자 사설은 <2580> 보도와 달리 IMF와의 ‘재협상’이 아닌, 매우 제한적인 범위의 ‘추후협상’을 언급한 것이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하자. 방송에 나갔던 ‘12월 5일 TV토론’이라는 부분은 틀렸다. 정확하게는 ‘12월 7일’이었다. 그런데 내 실수는 여기까지이다. 조선일보의 지면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봤다.
12월 4일 7면의 머리기사는 <무력했던 정치권 “나라 체통이...”>이다. 당시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했던 세 후보의 ‘이행각서’와 관련된 부분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여기서 <DJ는 “추가협상 여지” 단서>라고 썼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당시 국민회의측의 요구를 ‘추가협상’으로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 조선의 기사는 이상하다. 역시 5일자 7면엔 <“집권땐 IMF 재협상”-국민회의>라고 쓴다. 분명히 “국민회의는... ‘경제성장률 등 일부 조항에 대해 추가협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는 기사이다. 그런데 추가협상이란 단어가 왜 재협상으로 돌변했는가? 김원길 당시 정책위 의장의 코멘트에서도 재협상이란 단어는 나오지도 않는다. 다만 ‘추가협상’을 언급했을 분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매우 제한적인 범위의 추후협상을 언급한 것이다’라고 발뺌한다. 12월 2일자 사설은 분명 이렇게 쓰여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자금순환의 위기이며 신용과 믿음의 위기이기 때문에 은행융자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는 우리 경제의 숨통을 끊는 결과를 빚을까 염려되는 것이다. 정부당국자와 IMF측의 추후협상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자신들이 먼저 우려를 표해놓고도 특정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소재로 ‘재협상’을 걸고 나온 조선일보의 태도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설령 공격의 소재로 삼을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조선일보의 ‘추후협상’과 국민회의의 ‘추가협상’은 무엇이 달랐는가? 또 조선은 자신들은 ‘매우’ 제한적인 범위의 ‘추후협상’을 언급했는데 <2580>이 ‘재협상’이라고 보도했다며 ‘추후협상’과 ‘재협상’을 구별하지 않고 멋대로 왜곡 인용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왜 5일자 7면에서 ‘추가협상’이라는 국민회의 주장을 ‘재협상’으로 둔갑시켰는가? 조선일보 스스로도 ‘추후협상’과 ‘추가협상’ 그리고 ‘재협상’이 표현만 다를 뿐 실제로는 같은 맥락에서 쓰인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리고 도대체 조선일보의 사설 그 어디에서 ‘매우 제한적인 범위’라는 표현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찾아보고 알려주기 바란다.
***조선일보, 정령 ‘탄핵’을 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세번째로 <2580>은 조선일보가 탄핵을 ‘조장’했다고 몰아갔다… <2580>은 이런 사실을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종합 여론 조사 중 한 항목으로 오른 것만 표적으로 문제 삼았다.”
조선일보도 그토록 싫어한다는 ‘왜곡’은 최소한 하지 말자. 그리고 불필요한 말장난도 될 수 있으면 줄이자. 난 한번 썼던 기사 다시 쓰는 수고를 범하고 싶지 않다. 내가 ‘조장’이라는 표현을 썼던 대상은 바로 ‘월간 조선 조갑제 편집장’이다. 조선일보가 아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극우인사로 불리는 조갑제 편집장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다면 할 말은 없다.
<2580> 기사에서는 단지 노무현 대통령 취임 2년차로 접어드는 올해 초 새해벽두인 1월 1일부터 조선일보가 여론조사를 근거로 탄핵여론을 ‘공론화’했다고 썼을 뿐이다. 언론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기사를 쓰는 게 아닌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상식 아닌가? 조선일보는 여론화를 의도하지 않으면서 기사를 쓰는가? 누가 읽든 말든 단지 지면만 채우기 위해 기사를 쓰는가?
난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단 한 줄의 기사를 쓰더라도 그것을 읽거나 듣는 시청자들이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쓰라고 배웠다. 만약 조선일보의 기자들도 이같은 원칙에 충실한 기자들이라면 1월 1일자 지면에 ‘탄핵’이라는 단어를 쓴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공론화’를 시도했다는 말을 ‘조장’했다고 바꾸는 것 또한 의미의 ‘왜곡’이 아닌가?
그리고 또, 조선일보는 ‘탄핵하지 말라’는 뜻의 사설과 기사를 여러 번 썼다고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러지 말자. 조선일보의 글이라는 게 제목만 갖고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언론계에서는 그런 것을 일컬어 ‘제목장사’라고 하는 것을 한번도 듣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진정으로 조선일보가 탄핵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면 한 가지 덧붙여 묻자.
탄핵안이 발의된 다음날 조선일보의 1면 머리기사를 기억하는가? 탄핵을 망설이던 비서명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 뒤 시꺼멓게 <탄핵 가결 숫자 육박>이라고 내지 않았는가. 그 말은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그 누군가를 부추기는 말로 읽힌다. 조선일보가 진정 탄핵안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면 그 반대로 탄핵안을 발의한 의원들을 상대로 왜 그런 탄핵안에 서명했는지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놓고선 이제 와서 열심히 “탄핵은 옳지 않다”는 뜻을 밝혔는데 <2580>이 여론조사의 일부 항목만을 뽑아내 왜곡했다고 말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또 묻자. ‘공론화’와 ‘조장’이라는 단어의 위치마저 혼동할 정도로 조갑제 편집장과 조선일보를 동일시하는 조선일보가 왜 조갑제 편집장의 ‘탄핵 조장’ 발언에 대해서는 기사에서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조선일보 기사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조선일보가 선거 때마다 유리하면 부풀리고 불리하면 침묵한다”고 비판했다>고 썼다. 그런데 이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꾸겠다. “조선일보는 필요하면 부풀리고 필요하면 침묵한다”고 말이다. 내가 기사에서 말한 조선일보의 ‘침묵’이 바로 이런 경우이기 때문이다. 남을 비판하기 위한 아니 비난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뽑아내 의도적으로 비틀고, 스스로에게 불리하면 시침 뚝 떼고 침묵하는 수법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
***필요에 따라 부풀리고, 침묵하기**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 조선일보는 <불리하면 침묵한다>는 말이 참 듣기 싫었나 보다. 그런데 안 그랬는가? 정동영 열린 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에 대해서는 사설과 기사 등을 동원해 침을 튀기며 비판하던 조선일보가 왜 ‘김용서 이화여대 교수’의 쿠데타 선동 발언은 단 한 줄도 싣지 않았는가?
4월 12일자 신문, ‘투표일 황금연휴’라는 기사가 실린 그 신문을 기억하는가? ‘노인들은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다고 그렇게 비판하던 조선일보가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권리’라는 학력수준이 높은 익명의 20대 여성과 자신의 홈페이지에 ‘꼬옥 투표하세요’라던 익명의 여대생도 투표를 포기하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며 20대 젊은이들에게 투표하지 말고 놀러가라고 독려하는 듯한 기사를 쓰지 않았는가? 과연 그 기사의 의도는 무엇인가?
똑같은 날, 연합뉴스에 실린 기사를 보자. 연합뉴스는 그 기사에서 관광업체 관계자의 실명을 인용하며 긴 연휴에도 불구하고 예약이 저조한 것으로 보아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투표는 하고 가자는 인식이 많은 것 같다”라고 했으며 회사 관계자 또한 “총선으로 인한 예약률 변화는 없다고 봐도 좋다”고 소개하고 있다.
과연 유권자의 소중한 권리를 행사하는 총선을 앞두고 언론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익명’으로 처리해야 할 만큼 그 기사로 인해 ‘20대 여성’과 ‘여대생’이 받아야 할 비난이 큰 것인가? 혹시 익명이라는 편리한 담장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한 것은 아닌가?
‘침묵’이라는 단어에 그렇게 아파했으니 한 가지 더 묻자. 김용서 이화여대 교수의 발언을 조선일보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를 일대 혼란으로 몰아넣을 쿠데타 발언은 중요하지 않은가? 아니면 단지 대학교수가 한 말이니 기사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가? 그렇다면 이상하다. 조선일보는 온갖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입맛에 맞는 대학교수를 동원해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가? 한국외대 김○○ 교수를 시의적절하게 써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내가 기사에서 언급했던 의도적인 침묵이라는 것이다.
너무 길어졌다. 그런데 한마디는 하고 끝을 내야겠다. 난 ‘조선일보는 언론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조선일보도 당연히 언론이고 또한 실제로 많은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전파를 이용해가며 비판을 한 것이다. 만약 조선이 길거리에 흩뿌려진 ‘찌라시’ 수준이라고 여겼다면 왜 몇 년 치의 신문을 뒤지는 수고를 들였겠는가?
그리고 가슴이 아프다. 비판을 하려거든 침착해라. 흥분하지 말고 목소리를 키우지도 말고 머리를 차갑게 식힌 다음, 그리고 열린 가슴으로 상대방을 향한 칼날을 벼려야 한다. 내 기사를 비난했던 기사의 바이라인에는 내가 회사 선배들로부터, 아니면 기자사회 동료들로부터 ‘그 친구 참 기사 잘 쓰지’라는 부러움 섞인 칭찬을 들었던 선배의 이름도 포함돼 있다.
솔직히 난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뜨끔’했다. 그런데 기사를 다 읽고 반박의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뜨끔’했던 마음이 ‘뜨악’으로 돌변했다. 어쩌면 먼 훗날, 치열한 취재의 현장에서 그 선배를 다시 만난다면 ‘독한 소주와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곱창’을 사달라고 조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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