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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 칠성식당에서 학생들과 <부용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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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 칠성식당에서 학생들과 <부용산>을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 - 빠뜨렸던 이야기들 <56>

***7. 光州 칠성식당에서 학생들과 <부용산>을**

정치에서 은퇴한 후, 아편을 안 피워보아 모르지만 아편을 끊은 후가 그렇다는, 또는 경험한 바 있는 담배를 끊은 후의 금단현상과 같은, 참기 힘든 고통을 받던 때에 대학과 국회에서 친하게 지낸 이대순(李大淳) 총장의 각별한 호의로 광주에 있는 호남대에서 5년동안 객원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최소한 6교시는 강의를 해야 교수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 하여 하루에 몰아 6시간을 강의하기로 하였기에 아침에는 서울에서 광주로 비행기로 가지만 야간강의가 끝나고는 무궁화열차편으로 돌아왔다. 우등버스도 좋지만은 아무래도 안전제일로 기차를 택했으며, 또한 저녁에 광주서 소주 한잔 하는 여유도 가지면서 광주와 친밀해지려는 뜻도 있었다.

호남대에서 송정리역이 가깝지만 아무래도 광주 기분은 광주역 근처에서 느껴야 한다. 밤 강의가 끝나고 광주역까지는 택시비 만원거리. 대부분은 학생들이 차편을 보아주었다. 광주역앞 <칠성식당>이 단골. 역을 이용하는 손님들을 위한 대중식당인데 주인마님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할 후덕한 분. 추어탕, 오리탕, 삽겹살 등 안주에 가끔은 그곳에 나는 죽순무침, 민물고기매운탕도 서비스한다. 자주 나오는 꼬막도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재미있게 묘사되는 벌교의 꼬막을 화제로 삼으면서 좋아라했다.

강의시간에 소주생각이 있는 학생들은 칠성식당으로 오라고 말해둔다. 처음에는 10여명도 왔었으나 워낙 거리가 멀어 점차 두셋정도로 줄어들었다. 같이 상경하는 장행훈(張幸勳)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나 이상선(李相鮮) 장군이 자주 합석해 학생들을 격려했었다.

거기서 소주와 삼겹살을 권하며 학생들과 온갖 이야기를 하지만 역시 <부용산>을 불러야만 주흥이 돋아진다.

한번 소개한바 있지만 다시 소개하면.........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이란 벌교출신인 목포의 학교선생이 아끼던 여학생이 폐병으로 죽자(왜정때인 그때는 폐병이 치료가 어려웠다)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며 노래말을 지었고 거기에 안성현이라는 선생이 곡을 붙인 것인데 페이소스도 듬뿍있어 전라남도의 남쪽 해안지대에서 크게 유행했다 한다. 그 후 박기동 선생은 호주로 이민가고 안성현 선생은 북으로 가니 그 곡은 5.16후 언젠가 금지곡처럼 된 것같다. 그러나 노래는 애조를 띨 때 유행이 잘 되는 법. 2차대전때 유럽서 병사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는 <릴리 말렌>도 그렇단다.

이 <부용산>도 슬픈 사연의 것이여서 계속 유행이 되었으며 특히 여순반란사건후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신세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세도 이 노래에 실어서 불러 빨치산노래라는 딱지가 붙기도 하였다. 오랜 후 80년대 학생운동이 격앙되고 투옥된 학생들이 많아졌을 때 학생들사이에서도 이 노래가 애창되어 반체제노래라는 레텔이 붙여졌다.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해금 아닌 해금이 되어 TV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도 빨치산노래, 반체제노래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안 맞는 이야기다.

전남 출신 가운데 이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조덕송(순천), 이대순(고흥), 박석무(무안)씨 등은 성악가같다. 이 노래의 리바이벌에는 이대순 총장의 공이 크다. 친구인 김성우(金聖佑) 한국일보 논객에게 자료를 제공하여 칼럼을 몇 번 쓰도록 유도한 것이다. 유명한 연극인 손숙씨의 부군 김성옥씨는 같은 연극인으로 목포 출신인데 그 김성옥씨가 목포에서 부용산음악제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그 음악제에 앞서 호주로 이민간 작사자에게 몇십년만에 제2절의 작사를 부탁하여 왔는데 내 느낌에는 아무래도 당초의 제1절만큼의 감흥을 주지 않는다.

"그리움 강이 되어 /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 재를 넘는 석양은 / 저만치 홀로 섰네 /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 돌아서지 못한 채 /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 부용산 저 멀리엔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벌교에 부용산 노래비가 섰다는 것을 기사에서 읽었다. 또 나의 수강생 가운데 그곳 출신 지방의원이 있었는데 그가 한번은 부용산 정자 준공식의 초청장을 나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지방자치제가 확립된 후 서로 관광자원만들기에 열성이 된 때문도 있을것이다.

학생들에게 술자리 종반에는 이 노래를 가르치고 합창을 했다. 오래 계속되다 보니 주인마님도 흥얼흥얼 따라부른다.

어느날 대학의 교학처장을 만나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나보고 학생들에게 <부용산>을 가르치고 있느냐고 묻는다. 얼핏 내 강의를 감독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스쳤다. 또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 노래를 불온시하기에 그런 시각에서 묻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며칠후 의혹이 풀렸다. 다른 교수도 그런 말을 하기에 물어보았더니 대학의 신문에 났다 한다. 내 강의를 듣는 기자지망의 한 학생이 <부용산>이야기를 보충취재해서 신문에 장문의 글을 기고하면서 나에게서 그 노래를 배웠다고 쓴 것이다. 여하간 학생들이 매우 좋아한 것같다.

전남도청 근처의 금남로에서 5.18전야제 행사가 있다기에 저녁강의후 이상선 장군과 함께 가보았다. 전야제의 후반인 듯한데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당수도 연사로 참석하고 있었다. 많은 연사들의 연설내용도 거의가 반미성향이 뚜렷했다. 그런 것이 5.18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광주사람들의 시각인 듯했다. 칠성식당에 도착하여 소주를 마시며 이 장군은 그 분위기에 크게 놀란 듯 걱정을 많이 했다.

학생들의 논술답안을 보면서도 느꼈다. 민주화가 많이 진행된 YS정권 말기인데도 처음에는 극열한 반미논조가 많았다. 학생들이 읽은 책이나 논문들이 대부분 그런 것들이고 광주의 참혹했던 체험이 그런 분위기로 몰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2,3년 지나니 현저히 바뀌고 5년쯤에는 거의 정상화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칠성식당의 소주파티뿐만 아니라 광주생활은 유익했다. 이정규ㆍ박혜자ㆍ이상선 교수등과 함께 주변의 유명한 옛 정원인 <소쇄원>을 구경가서 상다리가 휘일 듯 가지수가 많은 전남의 한정식을 맛보기도 하고, 나주로 가서 금성산성쪽을 바라보며 유명한 곰탕을 먹어보기도 하였으며, 송정리의 명물 떡갈비를 푸짐하게 들기도 하였다.

광주에서는 그 해의 김치와 지난 해의 묵은 김치가 함께 나오는 게 특이한데 그 묵은 김치맛이 괜찮다. 근교로 나가 자라나 닭으로 끓이는 용봉탕도 맛보았는데 그때 함께 주는 닭고기회도 별미다. 닭의 꼬리쪽 부위라던가. 그곳에서는 개울물가에 자라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저래 광주에 정이 많이 들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의 여운이며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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