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學術세미나같은 金鍾仁 박사와의 술**
술자리가 학술세미나나 쟁점토론회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주섭일(朱燮日)· 장행훈(張幸勳)· 안병찬(安炳璨)박사와 신용석(愼鏞碩)씨 등 프랑스통 언론인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자리는 꼭 와인을 곁들이는데, 몇몇 쟁점을 건드리며 수준높은 토론을 한다. 공부방같다. 장소는 정해놓고 인사동의 <다미>. 한번 폭소가 터진 것은 프랑스특파원도 오래 지낸 안병찬 교수가 우리를 대접한다고 몇 년 묵은 <보졸레 누보>를 가져와서다. 술을 거의 못하는 그라 전혀 깜깜이었던것이다. 그후 겉절이와 김치를 먹을 때에는 이게 <보졸레 누보>고 저게 <와인>이라고 놀려대곤 한다.
김종인(金鍾仁) 박사와 함께하는 술자리는 반드시 학술세미나처럼 된다. 당대의 경제문제 대가인 김 박사이기에 그때 그때의 경제쟁점이 화제가 되어 그가 주로 이끌어가지만, 때로는 국제문제· 국내정치문제도 올려져 나도 말할 기회를 갖게 된다. 대학의 박사과정을 밟는 것같다. 가끔의 화두는 미국패권주의적인 신자유주의 물결에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하는 고민이며 모색인데 어떤 프레임이 있는 게 아니라 문제마다의 부분부분 대응과 그 축적이란 방식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그의 책제목을 적절하게도 <세계화와 그 불만>이라고 하였는데 그런 분위기의 대화다.
술은 주로 김 박사가 내는데 그는 한정식집을 택하고, 대포집에 갈 때만 나도 낼 기회를 갖는다. 둘은 고정멤버이고 거기에 2,3명의 손님이 꼭 참여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여러분야의 사람들을 추천한다. 물론 다른 사람이 주선하는 자리에 둘이 함께 낄 때도 가끔은 있다.
80년대초 그가"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들을 만나보시겠느냐"면서 조계사 뒤의 <유정집>으로 오란다. 가보니 박영호(朴榮浩) 김수행(金秀行) 정운영(鄭雲暎) 박사 등 모두 한신대 교수들이다. 모두 유럽서 공부한 쟁쟁한 이론가들. 김수행 교수는 학생들의 요청을 정운찬(鄭雲燦) 교수가 받아들여 서울대로 옮겼고, 정운영교수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중앙일보로 갔다.
지금은 서울대 총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정운찬 박사와는 그가 교수시절 김수행 교수 등과 광화문에 있는 일식집 <신원>에서 만나 좋은 경제학강의를 들었다. 그때는 마침 내가 김상현(金相賢) 의원이 내던 <다리> 잡지의 편집인을 맡고 있어서 김수행 교수에게 영국노동당 1백주년에 관한 원고를 청탁했었다.
권영길(權永吉)·천영세(千永世)씨 등 민주노동당 당수와 부당수는 그들이 민주노총에 있을 때부터 만나왔고 술자리는 종로구청앞 <감촌순두부>나 인사동의 <산호>같은 곳이었다. <감촌순두부>에서 빈대떡 순두부에 소주를 마시고 옆집 전통찻집 <다랑>에서 김영동의 국악테이프를 들으면서 함양 출신의 보살이 끓여주는 당귀차로 끝내면 좋은 코스다. 권· 천 두사람은 그렇게 명콤비일 수가 없다. 모두 노동운동 출신이지만 권 당수는 신문의 파리특파원을 했고, 천 부당수는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천아카데미 중간집단교육 노동부문 출신이기도 하다. 김 박사가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독일의 사회민주당에 관해서도 정통하기 때문에 독일과 한국을 대비해가면서의 노동운동· 진보정당 논의는 최상급의 수준이라 할 것이다.
나는 노동부에 있었기에 노동관계는 가끔 내가 <감촌순두부>에서 마련한다. 박길상(朴吉祥) 차관· 김원배(金元培)씨· 최영기(崔榮基) 박사 등 쟁쟁한 전문가들과 구체적 노동현안에 의견을 교환하는데 노동문제에도 연구가 깊은 김 박사는 지난날에 입법에 관여했던 경험이나 독일의 예를 이야기한다.
홍익대의 전성인 교수, 한성대의 김상조 교수 등과 효자동의 <행복한 마음>에서 보낸 시간은 좋았다. 모두 신진기예인 경제전문가들이다. 김상조 교수가 창여연대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을 언론에서도 보도되고 있다. 거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알았다. 전 교수가 학생때 도서관에 가서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대출받으려 하니 이미 누가 빌려간 후였다. 열람석에 앉아 다른 책을 보다 보니 앞의 여학생이 쿤의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그 학생이 바로 서울대 국사학과 1학년이었던 내 큰딸이란다.
언론계는 내가 기자출신이니까 주로 내몫이다. 한겨레의 김효순· 조준상씨, 프레시안의 박인규· 박태견씨 등인데, 내가 낼 때는 <감촌순두부>, 김박사가 살때는 <행복한마음>이 관행처럼 되었다. 한국일보의 세 여걸인 서화숙· 박금자· 김경희씨 등을 김 박사와 함께 <감촌순두부>서 만난 것은 특기할 일인데, 여성에게 소주를 대접할수 없어 양주를 갖고 갔다. 그 자리는 서화숙씨와 이름이 같은 내 장녀가 한국일보 수습기자 시험에 최종합격까지 했다가 방향을 바꾼 일이 있어 그 일이 화제가 되던 끝에 마련된 것이다. 한국일보 수습기자의 첫 2세대가 될 뻔한 이야기로 한국일보 사내보는 톱기사를 구상했었다는것이다.
갤럽여론조사의 최시중(崔時仲) 회장과도 어울리는데 한번은 그가 광화문께 일식집 <어부가>에서 마련한 자리는 여걸인 전옥숙 여사· 이부영 의원· 동아일보 배인준 논설위원 등 여럿이 참석하여 흥미진진하였다. 최 회장은 동아일보 정치부장, 논설위원에서 여론조사분야에 뛰어들어 전문가가 되었다. 갤럽은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후보 경선, 대통령선거 등을 매우 정확하게 짚었다. 놀랍다. 다만 노무현현상에 관해서는 좀 달랐던 것같다.
최근에는 <행복한마음>에서 김상조 교수· 문성현(文成賢)씨 등과 만났다. 문씨는 서울상대 출신이면서 공장노동자로 취직해 노동운동을 해온 놀라운 경력의 소유자로 나는 그에 대해 존경심까지 느끼는 처지다. 얼마전까지 민주노총 가운데 가장 큰 조직인 금속노련의 위원장으로 있었다. 그때 내가 <다리> 잡지에 2백자 1백매정도의 원고를 부탁했는데 신문사 논설위원 수준의 필력을 보여 나를 놀라게 하였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 할 것이다.
나도 주량이 어지간하지만 김 박사의 술실력은 대단하다. 나와 엄청 마시고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여자가 봉사하는 집에도 갔었으나 여성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속물티 전혀 없는 세련미랄까. 술자리가 끝나면 인사를 하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놀랍다. 순식간에 없어진다. 요술처럼.
내가 김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63년초 정치활동 재개가 허용되어 인현동에 있는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옹 댁에서 민정당(民政黨)이 태동할 때다. 80년대의 민정당(民正黨)과는 음만 같고 한자표기가 다를 뿐 아니라 순수 야당과 신군부세력 정당이라는 천양지차다. 가인 선생의 손자인 그는 외국어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는 기간에 사실상의 가인 선생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인이 곧 민정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니 비서실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조선일보에서 민정당을 출입하던 나는 그와 매일 만나게 되었고 아주 친하게 되었다.
그 후 오랜기간이 지난 후, 독일 경제학박사가 된 그는 신문사로 나를 찾아와 우정을 계속 잇게 되었다. 1978년 내가 낙하산공천으로 서울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자, 그는 당시 서강대학 교수로는 생각할 수 없는 큰 돈을 갖고와 보태란다. 놀랍고 고마웠다. 그는 부인이 이화여대 교수로 부부교수일 뿐아니라, 자기 집안도 집안이지만 장인이 은행장을 지내는 등 재력이 있었다.
당선된 후 술집에 초대하여 고마움을 표하자, 그는 "남형, 평소의 자세가 마음에 들어 도운것이니 앞으로도 그 자세만 유지하면 됩니다."하였다. 그후 술도 함께 마셨지만 정당도 함께 하게 되고 이리저리 인연이 이어졌다. 독일유학 시절에는 극우파집회의 연설을 듣다 분통이 터져 연단에 올라가 마이크를 뺏기도 했다는 열혈파다. 그런데 역시 가인 선생 집안이라 예의는 지킨다.
김대중정권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경제총수 등용설이 계속 언론에 나왔다. 막후탐색이 여러번 있었던 것같다. 내가 그와 친한 것을 아는 이들이 가끔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그 실력이나 뱃심에 있어서 가장 적격자이지만"글쎄......"하고 아쉬워한다. 그가 외국어대가 아니고 서울상대 출신이었다면, 독일 박사가 아니고 미국 박사였다면........" 역시 한국적 토양에서는 핸디캡이 아니겠는가. 또 그는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는 타입이 아니다. 소신파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끔 "관료란 영혼이 없는 조직"이라고 말하면 나는 질색을 하며 말린다. 그래야만 행정집행력이 있게 되는 것이기에. 말인즉 사회과학적으로 옳은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굳이 표현하면 듣는 관료들이 좋아하겠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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