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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대 김철의 술자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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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대 김철의 술자리도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 - 빠뜨렸던 이야기들 <51>

***2. 김철 대 김철의 술자리도**

김대중 정권때 장관을 하는 등 화려하게 등장을 한 김한길(金漢吉) 씨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하며 고독한 일생을 마친 선친 김철(金哲) 씨의 추모행사를 성대하게 마련하였다. 여러 권으로 된 당산(堂山) 김철 전집도 출판하고 세미나 리셉션도 가졌다. 더구나 연기자 최명길 씨가 며느님으로 나와 있으니 더 화려해 보였다.

나는 김철 씨를 30년 가까이 하며 지내왔지만 아호가 당산인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혁신 정객의 젊은 측에 속하였기에 아호로 부르지 않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 잘 두어 사후에나마 복을 받는구나 다행스럽게 여겼다. 다만 세미나에서 의외의 복병(伏兵)인 양 발표자의 한 사람인 장상환 경상대 교수가 유신 후 민주화투쟁을 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민족청년단(族靑)을 한 전력 등에 비추어 사회민주주의자로 일관했다고 볼 수 없고, 또한 당 간판만 지켰을 뿐 현실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는 요지의 혹평을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장 교수의 발표 내용은 틀린 데는 없지만 추모행사에서는 좀 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철 씨의 정치이야기가 중심이 아니고 술 이야기가 중심이니, 먼저 내가 어느 정도 호사가여서 이 김철 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에 있던 이름이 똑같은 김철 기자를 상면시켜 술을 마신 일을 꺼내야겠다. 나도 어지간히 심심했던가. 심심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그를 격려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술자리가 끝난 후 몇 번 흑석동 중앙대 뒤 높은 지대에 있던 그의 집에 모셔다 주기도 하였다. 기자 김철 씨는 나중에 국회의원으로 신문에 이름이 자주 났다.

김철 씨의 혁신정당은 통일사회당으로,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종로 3가께 사회민주당사가 있을 때 그 근처에 <농원>이라는 대중 술집이 있었고, 술집 주인은 전날에 농촌운동을 한 운동권이라 하여 가끔 함께 가서 마셨다. 의식화 된 여성이어서 사상가인 김 선생을 깍듯이 모셨다.

그 무렵 당사 지하다방에서 모금작품전을 했었는데 가보니 유명한 장공 김재준(長空 金在俊) 목사가 계시지 않는가. 굳이 따지자면 함경도 동향이라고도 할 것인데 물론 그것만은 아니고 정치적 격려 차원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혁신정객 가운데는 함경도 출신이 많았고, 특히 진보당의 경우는 그들이 핵심을 이루었다고 할 만했다. 그 모금전에 김종인(金鍾仁) 의원을 데리고 가서 장공의 세필(細筆) 족자를 소장케 했는데 장공이 작고한 지금에 와서는 김 의원은 그것을 보물처럼 아껴야할 것 같다.

또 그 때 나와 서울대 입학동기이며 피난 부산시절부터 친구인 서울상대의 임종철(林鍾哲) 교수가 사회민주연구소의 소장으로 김 선생의 정책브레인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 잡지에 임 교수의 정치참여를 높이 평가하는 칼럼을 쓰기도 하였다.

내가 가끔 박주나마 술을 대접하니 김 선생이 한 번은 외국 여행에서 일본술 사께의 작은 병을 하나 사와 마시잔다. 정다운 느낌이었다. 또 내가 국회의원이 된 다음 서초구 서래마을의 집에 외국기자들과 함께 초청하여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의 영어 실력은 유창한 것은 아니지만 또박또박 정확하게 의사를 통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2공화국 시절 통일사회당의 국제국장으로 있던 김철 씨를 알고부터 처음 듣는 그의 영어였다.

독립운동가들을 평할 때 그 업적보다는 지조를 중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혁신운동가의 경우에도 물론 업적이 중요하겠지만 일관되게 노력하는 고집도 고려에 넣어야 할 것 같다. 김철 씨의 경우도 5.16 후 제3공화국의 엄혹한 시절에 혁신의 기치를 과감히 들고 고집스럽게 고생을 하였다. 서울역 근처 갈월동의 2층에 있던 초라한 셋방 당사에서 그와 늘 함께 다니던 안필수(安弼洙) 씨와 고달픈 정치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과는 계속 유대를 가졌다. 권력이 편의에 따라 여권을 내주기도 하고 안 내주기도 했는데 족청시절부터 친남매처럼 지내는 김정례(金正禮) 여사가 중간에 나서서 도와주기도 하고, 공화당의 박준규(朴浚圭) 당의장이 은근히 지원하기도 했다.

런던의 SI대회에 여권이 안 나와 못 가게 되었을 때에는 나와 대학동기이며 동화통신 기자를 하던 중 영국 유학을 간 최상징(崔相徵) 형이 위임을 받아 대신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최 형도 사상청년으로 서울 법대에서는 알아주는 얼마간 진보적 서클인 사회법학회를 창설한 주동인물이며 초대회장이었다. 김철 씨와는 아마 나보다 더 가까웠을 것이다.

SI의 칼슨 사무총장이 1979년 방한하였을 때다. YWCA 앞에있는 레스토랑에서 환영행사가 있었는데 주최 측인 김철 씨는 윤반웅 목사등 그 때의 이른바 재야인사들 여러 명의 인사말을 시키면서도 그 자리에 마음먹고 나온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당의장 박준규 씨는 끝내 묵살하는 게 아닌가. 모임이 끝나면서 몇 번 신호를 보냈던 공화당의 신형식(申泂植) 사무총장은 "너무 한 게 아녀"했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혁신정당의 당수로서 공화당에 대한 거부감은 이해하나 그래도 혁신정당에 관심을 표명하는 박준규 씨를 그렇게 냉대한 것은 전술적으로도 현명하다 할 수 없다. 박준규 씨가 당의장에 취임했을 때 나를 불러 김철 당수의 축하화분을 받고 싶으니 나서 달라고 하기에 갈월동 당사에 가서 김철 씨의 허가를 받고 내가 화분을 사다 놓은 일도 있다. 서울대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던 박준규 씨는 자신도 리버럴로 자처하지만 혁신정당에 이해를 갖고 있고 조금은 도왔었다. 그런데, 그러한 데 대해서도 박절해야만 하는 것이 외로운 혁신정당을 하는 데 필요한 자기방어적 고집일까.

김철 씨와 고정훈 씨는 제2공화국 때 통일사회당의 국제국장과 선전국장을 할 때부터의 라이벌인 것 같다. 5.18 쿠데타 후 입법회의가 생겼을 때 김철 씨는 너무 오래 고생했기에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입법회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관제 혁신정당의 역할은 고정훈 씨에게 떨어졌고 고 씨는 서울 강남에서 국회에 진출하였다. 그런 라이벌인데…고 씨가 강남 성모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 김 씨는 고 씨를 문병하여 주변에서는 유종의 미를 보였다 하였다. 그 이야기도 감동스러워 나는 한 잡지의 칼럼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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