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말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은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해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부시 미 행정부에게는 가뭄 끝에 단비같이 귀중한 외교적 성과였다.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명분으로 시작한 이라크 전쟁은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민주당쪽의 비난에 대해,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켜 놓지 않았냐면서 힘겹게 맞서던 부시 행정부에게, 리비아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부시 대통령은 금년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차원에서 언급하면서 자신의 이라크 정책이 성공하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로 삼았다. 부시는 이날 연설에서 12년간의 대 이라크 외교가 실패한 반면 9개월간의 대 리비아 외교가 성공했던 것은 말이 말로만 끝나지 않고 신빙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찰스 크로서머 (Charles Krauthammer)와 <National Interest>지(誌)의 존 오설리반 (John O'Sullivan) 같은 대표적인 네오콘 논객들도 리비아가 이라크 전쟁에 놀라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며, 무력을 동반한 외교만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음을 일제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무엇보다 타이밍을 강조했다. 즉 리비아측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일주일 전에 영국에 협상을 제의하고, 후세인이 체포된 직후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한 것은 이라크와 똑같은 꼴이 될까 두려워했음을 입증하는 단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이라크 전쟁은 그 의의가 충분히 드러난 셈이며, 다른 테러지원국 혹은 대량살상무기 불법 취득국들에게까지 속히 리비아의 뒤를 따르라는 강력한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다른 네오콘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리비아 사례를 통해 네오콘들이야말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실용주의자들임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2002년초까지 부시의 경제분야 연설문을 담당했던 데이빗 프럼(David Frum)과 국방부 자문위원인 리처드 펄 (Richard Perle)이 그 주인공들인데, 이들은 네오콘들이 그동안 언론에 의해 이데올로그라고 매도당해 왔지만 실제로 리비아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네오콘들이 주장해온 강제적 수단이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었다고 강변했다. 이들에 따르면 오히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Brent Scowcroft)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 온건론자들이야말로 외교와 국제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릇된 가정을 신봉하면서 사실을 외면하는 이데올로그들이다.
그러나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에 이르기까지 주요 협상과정에서 실제로는 네오콘들이 배제되는 가운데 온건론자들이 협상을 주도해 온 것으로 알려져, 미국이 리비아와 자못 심각한 협상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작년까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중동담당이었던 프린트 레브렛 (Flynt Leverett)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리비아와의 협상은 이라크전쟁이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면서, 이같은 사실을 공개했다.
레브렛에 따르면 리비아는 오랜 경제제재와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90년대말부터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리비아가 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발생한 팬암기 폭파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지않는 한 관계개선은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리비아는 이에 대응해 로커비 사건에 연루된 두 명의 정보요원들을 스코틀랜드 법정에 넘겼다.
부시 행정부에 들어와 미국은 리비아측에 로커비 사건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배상하고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면 유엔의 경제제재 해제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거래의사를 밝혔다. 이 제안은 콘돌리사 라이스 안보보좌관과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이 주축이 되어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낸 것이었다. 작년초 리비아가 이 요구사항들을 수락하자, 미국은 다음단계로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미국의 대 리비아 경제제재 해제 조건으로 요구했다.
이렇듯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포기는 미국이 이라크 전쟁 이전부터 5년여간 인내심을 가지면서 이라크에게 분명한 거래 목록을 제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레브렛은 미국이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검증하게 되면 올해를 넘기기 전에 경제제재를 풀어줄 수도 있음을 시사했었다고 밝혔다. 물론 이같은 협상과정에서 국무부의 존 볼튼 차관과 국방부의 네오콘들은 빠져있었다.
레브렛의 말대로라면, 그리고 이 사실을 이란이나 시리아 그리고 북한 등이 잘 알고 있다면, 이들 소위 불량국가들이 리비아의 사례를 따를지 여부는 앞으로 미국이 리비아에게 한 약속을 얼마나 잘 지켜나가느냐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벌써부터 미국내 보수파들 사이에서 리비아의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경제제재를 해제해줘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금년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라크 정책의 문제점들이 부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시 대통령도 강성외교보다는 실용주의 외교노선에 더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높지만 이것이 얼마나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더군다나 현재로서는 리비아 사례가 부시 행정부 외교정책의 노선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기보다는 예외로 남을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북핵 6자회담을 다뤄가는 미국의 태도를 지켜보면 이런 느낌이 더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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