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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風流)를 안 선비 정치인 송남헌(宋南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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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風流)를 안 선비 정치인 송남헌(宋南憲)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 - 빠뜨렸던 이야기들 <50>

강서문인협회가 발행하는 <강서문학>에 5회에 걸쳐 <문주(文酒) 40년>이라는 글의 연재를 마치고 나니 포함시키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뒤늦게 떠오른다. 그리고 더 쓸게 많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래서 속편을 써본다. 필자

***1.풍류(風流)를 안 선비 정치인 송남헌(宋南憲)**

작년에 경심(耕心) 송남헌(宋南憲) 씨가 80대 후반에 평균수명을 넘기고 별세하였을 때,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서 이부영 의원은 사회장을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상의하듯 이야기한다. 자연스레 사회장이 거론될 만큼 송남헌 선생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당대의 지사(志士)였다.

3년쯤 전에 송 선생이 그의 저서 <해방 3년사 Ⅰ,Ⅱ>권으로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옹을 기념하는 심산상을 받았을 때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훌륭한 시상식과 축하파티가 있은 후에 동주 박진목(東洲 朴進穆)씨가 나에게 강신옥(姜信玉) 변호사와 함께 2차파티에 가잔다. 요즘 유행어로 이른바 뒤풀이다. 뒤풀이란 말이 괜찮다.

인사동에 있는 한정식 집 <향정>에 가서 마시고 있으니, 송 선생이 와서는 나이 많은 부인들만 5,6명이 있는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점잖은 여류인사들이 송 선생을 위한 별도의 축하연을 하는 자리다. 그 가운데 둘은 아는 사람으로 한 분은 고정훈(高貞勳) 씨의 혁신정당으로 대통령후보로도 출마한 바 있는 전직 외교관 홍숙자(洪淑子)여사다. 홍 여사는 나에게 동갑내기라며 말을 건네는 처지다. 우리 쪽에는 합류하잔 말도 하지 않은 송 선생은 꽃밭(?)에서 청일점으로 호강을 한다. 나는 그 때 대단히 감탄했고 송 선생을 재평가 했다. 85세가 넘는 노령에 60,70대의 귀부인들에 둘러싸여 축하술을 받고 있다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이 이야기를 나는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며 부러워하였다.

송 선생이 풍류를 아는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귄 여성들 역시 풍류를 아는 멋쟁이들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한 교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여기서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경심의 아드님이 재정적으로 얼마간 여유있게 뒷받침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인데도 두산 이동화(斗山 李東華)씨는 매우 어렵게 지내며 고생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처음 송 선생을 알게 된 것은 4.19 후 신문기자로서 통일사회당을 출입하면서이다. 혁신진영은 총선거가 끝난 뒤 통일사회당, 사회대중당(金達鎬 당수), 혁신당(張建相 당수), 사회당(崔謹愚 당수) 등 네 갈래로 나뉘어졌는데 그 가운데 통일사회당만이 민의원-참의원 예닐곱 개 의석을 가진 그래도 알찬 정당이었다.

통일사회당의 당수라 할 정치위원장은 두산 이동화 씨, 그 다음인 당무위원장은 송남헌 씨, 국회의 대표는 청곡 윤길중(靑谷 尹吉重)씨였으며, 실제로 당을 이끌었고 기둥역할을 했던 동암 서상일(東庵 徐相日) 씨는 고문으로 있었다.

그러고 보면 동암은 참 겸손한 분이었다. 해방 후 보수주류인 한국 민주당의 8총무 가운데 경북을 대표한 총무였던 그는 그 후 혁신계 정치인이 되어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씨와 손을 잡고 진보당을 창당하려 하였다. 그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민주혁신당(民革黨)을 만들었는데 그 때 이동화 씨는 정책브레인이었고, 나중에 국회의장을 지내게 되는 일성 김수한(一聲 金守漢) 씨는 대변인이었다. 그 때의 혁신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일본에서 통일일보(문선명 목사와는 무관)를 내던 죽산계인 창정 이영근(蒼丁 李榮根) 씨의 한탄이 있다. '그 때 죽산이 동암과 손을 잡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이다. 진보당도 더 발전하였을 것이고, 실없는 가상이지만, 진보당 사건도 혹시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는 것이다. 동암은 경북의 프린스일 뿐아니라 정통보수정당인 한민당의 8총무 중 하나가 아닌가. 죽산에게는 그 이상의 울타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창정이 즐겨쓰는 말로 "죽산이 동암의 갓을 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죽산 주변의 이른바 약수동파라는 소장 강경파들이 동암의 한민당 경력을 트집잡고, 또한 동암에게 당권을 빼앗길까 염려하여 그를 극렬하게 배척하고 회의석상에서 폭언을 하는 등 망신을 주어 산통을 깬 것이다. 불과 몇 년 후에 통일사회당에서 고문으로 겸손히 2선에 선 것을 보면 어이없는 배척이었다 할 것이다.

창정의 말이 난 김에 직접 관련은 없지만 한 가지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죽산의 비서실장 격이었고, 브레인이었던 창정은 죽산을 사후에 평가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레텔을 붙이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죽산 자신도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다만 민족의 자주 노선과 수탈없는 경제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운운하는 레텔을 붙이면 범위가 좁아질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발달한 사상이 당시의 한국현실에 딱히 맞지도 않았다는 논리이다. 요즘도 음미해 볼 만한 이야기이다.

62년에 조선일보로 옮겨서 조덕송 씨와도 친해지면서 나는 "신문기자로는 조덕송, 만약 정치를 한다면 정치인으로 송남헌을 모범으로 삼겠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어디다 그런 내용의 글을 쓰기도 했었다. 공교롭게 조덕송 씨도 송남헌 씨를 스승처럼 깍듯이 모시는 사이인데, 둘은 학처럼 고고하다면 좀 과장이겠지만 모두 맑고 올곧은 선비형이다.

5.16 후 송 선생은 2,3년 옥고를 치렀는데 통일사회당의 부당수급으로는 빨리 석방되었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대구사범의 잘 아는 후배인 박정희 대통령이 혁신계 탄압의 와중에서도 좀 배려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왜정 때는 이른바 단파(短波)방송청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항일인사였으며, 해방 후는 우사(尤史) 김규식 박사의 민족자주연맹 비서실장으로 남북협상에 동행하기도 한 분이다. 그런 분에 조금이라도 흠이 갈 말을 하면 안 될 일이다.

그런 짐작은 가능하다. 제2공화국 때 혁신진영은 남북협상파와 중립화통일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민족자주통일연맹(民自統)이 남북협상을 적극 추진하여 영향력이 매우 컸었는데 거기에는 통일사회당을 제외한 모든 혁신정당이 가맹했었다. 통일사회당은 처음에는 참여했었으나, 남북협상추진방법을 놓고 대립하여 떨어져 나와 별도로 중립화통일연맹을 만들었다.

그 때 을지로에 있던 민자통(民自統) 사무실에서 고정훈(高貞勳) 통일사회당 선전국장이 남북협상파를 상대로 치열한 설전을 전개하는 것을 칸막이 사이로 엿들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 씨는 "김일성 입경환영위원회를 만들 생각이오"하는 등의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후 5.16세력이 쿠데타의 명분세우기 등으로 혁신계를 탄압할 때(물론 위험분자가 소수 있었겠지만) 남북협상파를 중립화 파보다 위험시하였고 더 엄하게 처벌한 것 같다.

송 선생을 모시고 술을 여러 번 한 셈이다. 조덕송 씨와도 하고, 이동화, 윤길중 씨와도 함께 하고, 특히 박진목 씨와 자주 자리를 같이 하였다. 통사당의 국제국장이었던 김철(金哲) 씨와는 그가 선배를 잘 못 모신다고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는데, 김철씨는 몇 번인가 내가 송 씨와만 친하게 지낸다고 불만을 말하였다. 일본에 있는 통사당 조직국장 박권희(朴權熙) 전 국회의원은 아주 드물게 만날 수 있었다.

말년에는 민주사회주의 연구회의를 중심으로 이동화 의장, 송남헌 부의장, 고정훈 이사장의 콤비로 밀접하게 움직였다. 실적은 별로 없었지만 깃발을 들고 있던 셈이다. 어려운 가운데 풍운아 고정훈 씨가 돈을 겨우겨우 꾸려갔다. 이동화, 송남헌 씨는 돈과는 전혀 담을 쌓은 이들이니까 말이다.

독립운동가도 모시고 통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민족정기회('민족통일촉진회'라 개칭되기도 했다)에서는 송 선생이 박진목 씨와 강신옥 변호사 등을 주로 만났다. 85세를 넘긴 송남헌-박진목 씨 등이 인사동의 <그리고,>란 까페에 자주 나타나 동마담의 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며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만 놀라웠을 뿐이다. 저렇게 풍류있게 나이 들어갈 수가 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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