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는 실로 놀라운 칼럼이 실렸다.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유출시켜 미국의 언론과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장본인 다니엘 엘스버그가 기고한 '이 전쟁에 대항하여 비밀을 누설하라(Leak Against This War)'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이라크 전쟁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기밀문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체제 내 인사들의 양심적 행동을 공개적으로 종용하는 글이다.
32년전 고위 국무부 관리로서 베트남 전쟁의 전모에 대한 내용이 담긴, 무려 7천 페이지 분량의 미 국방부 비밀문서(Pentagon Papers)를 언론에 유출시킴으로써 이 전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기만정책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했던 엘스버그는 이 칼럼에서, 자신이 지난 한 해 동안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무섭게 느껴 왔다고 말한다.
"나는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가 이라크에 쳐들어간 이유, 그리고 침공과 강점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예전에 내가 섬겼던 대통령들만큼이나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했고,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지금 워싱턴과 런던의 정부기관의 금고 속 어딘가에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라크의 펜타곤 페이퍼'가 보관되어 있음을 확신한다며, 양심 있는 공무원들은 미국의 불법 전쟁의 흑막을 알리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이런 문서들을 유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국가의 메이저 신문이 공무원들의 실정법 위반, 그것도 국가기밀법 위반을 부추기는 글을 싣는 것은 심상치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심상치 않은 시대이지 않은가. <가디언>이 진보신문임을 감안하더라도, 미국과 형제관계인 영국의 주류 언론에 이 같은 글이 실렸다는 것은 미국이 지금 이라크에서 벌여놓은 전쟁을 세인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절박한 감정이 이 전쟁을 주모한 미국과 영국에서도 얼마나 날로 보편성을 띠어가고 있는지를 단편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단, 대통령이 4번 바뀌면서도 국가차원의 기만정책이 계속되었던 베트남전쟁과는 달리 이라크 침공은 전적으로 조지 W. 부시 현 정권의 작품임을 상기할 때, 그 거짓의 근원을 발본색원하려는 시선은 당연히 지금 백악관에 살고 있는 사람과 그 주변에서 그를 받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엘스버그의 '전쟁에 대한 비밀을 누설하라'는 종용은 부시 행정부와 주변 관계자들이 부시 행정부의 비리를 폭로하라는 주문에 다름 아니다.
엘스버그의 글에서 호흡하는 양심과 정의심을 느끼면서, 본 지 오래되어 잊혀져 가고 있던 영화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1976)'의 시사성에 다시금 주목하게 된다. 앨런 파쿨라 감독의 이 작품은 지금 갈수록 신뢰와 도덕성의 상실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미국의 현 대통령에 비추어 다시 한번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미국의 헌정사상 최악의 스캔들을 그린 이 영화, 당시 단순한 절도사건으로 묻혀 버릴 뻔 했던 '2단짜리 기사'로 댕겨진 취재의 불씨가 결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불후의 대특종으로 번진 스토리. 언론에 관심을 가져 본 사람치고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한국에서 상영이 금지됐다가 뒤늦게 '대통령의 음모'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영화(그리고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이 공저한 책)의 원제는 미국의 첫 계관시인인 로버트 펜 워렌이 쓴 'All the King's Men'이라는 정치소설(1946)의 제목을 상기시킨다. 이 소설은 1920~30년대 미국의 정계를 풍미한 부패한 정치가 휴이 롱(Huey Long)의 이야기를 토대로 쓴 것으로, 1949년에 이를 각색하여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가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All the King's Men'이라는 제목은 'Humpty Dumpty'라는 다음의 라임(rhyme)에서 나왔다.
Humpty Dumpty sat on a wall,
Humpty Dumpty had a great fall.
All the King's horses and all the King's men
Couldn't put Humpty back together again.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지어진 것으로 알려지는 이 라임의 'Humpty Dumpty'는 성벽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던 대포를 지칭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흔히 권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권세가 높은 곳에서 추락(had a great fall)하고 난 뒤에는 왕의 그 모든 병력(all the King's horses)과 왕의 그 모든 사람들(all the King's men)도 그 박살 난 권세를 다시 고칠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대통령의 사람들'이 단순히 워터게이트 사건 일지를 나열한, 진지하기만 하고 무미건조한 '기록영화' 수준을 뛰어넘어 훌륭한 스릴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로버트 레드포드·더스틴 호프만· 제이슨 로바즈 등 나무랄 데 없는 연기와 함께 제목에서 언급하는 그 정체 모호한 '사람들'이 집합적으로 만들어내는 권력의 음험한 분위기를 감독이 너무도 절묘하게 표현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파쿨라 감독은 닉슨 주변의 주요 '사람들'을 직접 보여주는 것을 삼가고, 대신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TV 화면에서 잠깐 나타나는 모습, 그리고 도도한 리무진의 속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 검은 유리창 등을 통해 그들의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을 암시하는 기법을 썼다.
'딥 스로트(Deep Throat)'는 이러한 뉘앙스가 짙게 깔린 으슥한 그림자 속에서 어둠의 사신처럼 출현한다. 입사한 지 9개월 밖에 안 된 신참기자 우드워드를 지하주차장에서 만난 '딥 스로트'는 실명이든 익명이든 일체의 인용보도를 거부하고, 자신이 소위 '심층 배경(deep background)'의 제공자일 뿐임을 고집하면서 취재의 전체 방향을 지도해주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뿜으며, 체제 내의 깊은 곳에서만 나올 수 있는 백그라운드 정보를 훈계조로 전해주는 그의 모습은 양심적 내부고발자의 모습만은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그는 단순히 닉슨에게 불만을 품은,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감정에 사로잡혔던 '배반자'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닉슨 행정부 내에서 비밀리에 자행되고 있었던 사악한 일들이 내부 고발자의 입에서 분출구를 찾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진실은 어디엔가 숨어있고, 누군가에 의해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상투적인 개념보다는, 되레 진실이 권력자들에 의해 얼마나 쉽게 감춰지는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진실은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있는 힘을 다해 찾지 않는 이에게는 그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72년 6월부터 워싱턴포스트가 연달아 실은 특종기사를 그 해 연말까지도 다른 주요 언론사에서 '받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대통령의 사람들'을 헐리우드의 통념에 맞춰 만들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이 속 시원하게 드러나고 주범들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야 했으나, 이 영화는 그 따위 손쉬운 결말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마지막 장면에서 72년 11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재선된 닉슨의 취임식 실황이 편집국에 놓여 있는 TV에 시끄럽게 방영되고 있는 가운데, 파쿨라 감독의 카메라는 타자기 앞에서 열심히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두 기자의 모습에 천천히 다가간다. 그렇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부패한 권력자가 아직 건재하다 할지라도, 진실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는 기사 쓰기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오늘, 또 다른 미국의 대통령이 진실의 심판대에 올라있다. 이라크 침공의 구실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허구는 이미 드러났고, 전 재무장관과 전 이라크무기 사찰단장 등 그의 '사람들'의 입에서 속속 나오고 있는 사후 발언이 아직도 몸통이 드러나지 않은 더 큰 비밀의 언저리를 건드리고 있는 듯하다. 곧 임박했을 지도 모르는 대형 폭로의 머리카락이 보이는 느낌이다.
그러나 엘스버그의 말대로 이보다 더 큰 거짓말이 있다면, 그 '결정타'는, 마치 닉슨의 혼을 이어받은 듯 '비밀유지'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부시 행정부의 은폐의 장막 그 뒤에 아직 숨어있다. 엘스버그가 불러내려 하는 이 시대의 '딥 스로트'는 그 장막의 이 편으로 나와 줄 것인가. 혹은 벌써 나타났는데도 권력과의 이해관계가 복잡한 기자들이 그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미국의 언론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 보여주는 그런 언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루퍼트 머독의 폭스 뉴스처럼 공화당을 대변하는 보수언론은 차지하고라도, 이른바 '정도'를 걷고 있는 언론의 객관적인 듯한 보도에서도 정권과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몸사림이 보인다. 연봉이 몇 십만 불씩 하는 '일선 기자'들은 기득권과 상류사회의 라이프스타일에 흥건히 취해 있다. 그들이 무사안일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경악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당장 '이라크의 펜타곤 페이퍼'가 편집국에 택배로 배달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를 보도할 용기가 있을까. '딥 스로트'가 지하 주차장에서 만나자고 해도 그들은 이것저것 재며 그를 만나기를 주저하지는 않을까. 이런 회의가 들면서도, 지금 이 시대의 '딥 스로트'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는 것은, 아직도 어딘가에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념의 '골수' 기자들의 붓끝이 살아 있음을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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