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은 2003년을 장식한 대사건이었다.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비껴간 이 침공은 21세기 지구촌 논쟁사에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 규범을 둘러싼 일방주의(unilateralism)ㆍ다자주의(multilateralism)의 뜨거운 공방을 낳았다.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냉전시대의 막이 내린 뒤 유일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일방주의는 제3세계는 물론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유럽국가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아왔다.
<사진1> 부시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과 아울러 이라크 침공 정책에 직격탄을 날린 『충성의 대가』
이에 맞서 이른바 '네오콘'(neocon)이라 일컬어지는 미국의 강경파들은 9.11 테러 공격을 입은 미국의 '열악한 안보환경'을 빌미로 '힘의 논리'를 내세워왔다. 이른바 '부시독트린'의 핵심인 선제공격론은 9.11이 낳은 합리적 대응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반(反)부시, 반미전선의 논객들은 미국의 일방주의가 힘으로 미국의 평화를 지키고 내친 김에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패권주의적 논리에 다름 아니라고 반박한다. 미국의 안정적 석유자원 확보를 노린 이라크 침공이 바로 그 증거라는 비판이다.
***전직 장관의 창 끝, 부시 심장 겨누다**
부시 비판론과 그의 일방주의 옹호론의 기(氣)싸움은 2004년 대선을 맞아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시각을 달리 하는 두 권의 책이 함께 서점에 나왔다. <월 스트리트 저널> 기자 출신으로 퓰리처상 수상자인 론 서스킨드가 부시행정부의 전 재무장관 폴 오닐의 증언과 자료 제공을 바탕으로 1월13일 펴낸 『충성의 대가』(The Pricce of Loyalty, 사이몬&슈스터 출판사),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시행정부에서 막강 영향력을 행사해온 리처드 펄(현 펜타곤 국방자문위원)과 부시대통령 연설문 작성요원 출신인 데이빗 프럼이 함께 쓴 『악(惡)의 종말: 테러와의 전쟁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An End to Evil: How to Win the War on Terror, 랜덤하우스 출판사).
『충성의 대가』는 부시 행정부 고위관료 출신이 자신의 주군을 겨냥해 직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책이다. 2년 가까이 부시 대통령의 총애를 받다가 감세(減稅) 정책을 둘러싼 의견대립 등으로 2002년 12월 해임된 뒤 침묵을 지켜오던 오닐 전 장관은 이 책의 출간에 즈음, 잇단 인터뷰로 화제를 모으는 중이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 미 메이저 방송의 하나인 CBS의 간판 프로그램인 '60분' 등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그의 폭탄발언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부시 대통령 개인과 부시 행정부의 정책결정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 다른 하나는 이라크 침공정책에 대한 비판 발언이다.
(CBS '60분' http://www.cbsnews.com/stories/2004/01/09/60minutes/main592330.shtm,
<타임> 인터뷰 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1101040119-574809,00.html)
오닐 전장관은 부시 대통령이 미국이란 큰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는 자질에 문제가 있음을 꼬집었다. 그는 장관 지명에 즈음, 부시와 처음으로 독대를 했을 때를 돌이켜 보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부시 대통령 당선자를 만났을 때 미국의 재무정책과 관련해) 논의할 여러 가지 내용을 준비했다. 나는 당연히 부시가 나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와 얘길 나눌 때, 나 혼자 이야기하고 부시는 듣기만 해 아주 놀랐다. 내 말은 거의 독백(monologue)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한 군데 집중을 못하고 건성으로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워싱턴 정가 주변에선 이미 알려진 얘기다. 오닐 전 장관도 부시 대통령이 각료회의 중 주의가 매우 산만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아가 오닐은 부시행정부의 각료회의에서 생산적인 정책결정 시스템이 돼있지 못하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대화가 없다는 게 부시 행정부 각료회의의 특징"이라 말했다. 책 제목대로 부시행정부에선 부시에 대한 충성(loyalty)만이 가장 높게 평가될 뿐이란 지적이다. 오닐은 "참된 충성이란 (부시가) 듣기를 바라는 말 대신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은 너무 허점투성이라, 고위관리들은 부시가 바라는 걸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예감에 의존해 일을 한다"고 증언했다. 그는 CBS '60분'과의 인터뷰에서 부시 대통령을 '귀머거리들이 한방 가득히 앉은 가운데 있는 장님'(a blind man in a room full of deaf people), 실질적인 토론과 대화를 멀리하는 각료들을 '귀머거리'라 꼬집었다. 이를테면 (사실상 백인 부자들을 위한) 세금 감면 정책토론의 경우, 부시 행정부의 핵심들은 "세금감면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at any cost) 좋은 일"이라며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책에서 오닐은 특히 딕 체니 부통령의 처신을 세차게 비난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를 찾지 못한 것은 2004년 연말의 재선고지를 노리는 부시 대통령에겐 감표(減票) 요인으로 남아있다. 오닐은 바로 그러한 부시의 이라크 침공 아킬레스 건(腱)을 건드렸다. "이라크가 WMD를 갖고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본적이 없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그는 "23개월간의 재임기간에 이라크의 무기프로그램에 관해 (부시행정부 강경파들의) 주장만 있었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나아가 오닐 전 장관은 자신의 구술을 받아쓴 책에서, 부시 대통령이 9.11 동시다발테러가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이라크 침공을 계획했다고 비판했다.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그의 고위 보좌관들은 당선 바로 뒤부터(from the start)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확실한 정보를 활용했다"는 주장이다. 부시행정부의 강경파 리더인 폴 월포위츠 국방 부장관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사담 후세인 제거론을 펴온 인물이다. 오닐의 증언은 9.11 이전에 '부시독트린'의 뼈대인 선제공격론이 부시행정부를 지배했다는 것을 뜻한다.
***두 유대인 네오콘의 '힘의 미국'예찬론**
<사진2> 부시의 일방주의를 변호하고 강경 대외정책을 통해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강조한『악(惡)의 종말』
리처드 펄과 데이빗 프럼은 유대인 출신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 맹장으로 미 네오콘의 집합처인 미국기업협회(AEI) 핵심 멤버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 두 사람의 공저인 『악(惡)의 종말: 테러와의 전쟁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는 선제공격론으로 대표되는 부시 행정부의 세계지배론의 정당성을 내세운 책이다. 이 책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강조할 뿐이다. 왜 미국이 9.11 공격을 받았고, 또한 전세계적으로 반미감정이 퍼지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성찰의 공간은 도대체 찾을 수 없다. 미국내 한 비판적 웹사이트가 '카우보이 제국주의'(cowboy imperialism)라고 혹평한 것도 무리는 아닌 듯 싶다.
(『악(惡)의 종말』서평 www.dissidentvoice.org/Jan04/Ireland0106.htm)
미 국방부 자문위원(전 국방자문위원장) 리처드 펄은 마찬가지로 유대인인 헨리 키신저의 측근으로 워싱턴 정계에 입문,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때 국방차관보(국제안보정책 담당)를 지냈다. 부시 행정부의 유대인 네오콘 가운데 막후 실력자다. 국가안보에 관한 한 초강경 논리를 펴온 까닭에 '어둠의 왕자'(Prince of Darkness)란 별명을 얻었다. 이권개입 스캔들로 펜타곤의 2003년 3월 국방자문위원장직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친구인 럼스펠드 국방의 배려로 위원직을 그대로 갖고 있다. 그의 줄기찬 주장은 '창조적 파괴론'(creative destruction).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려 중동 정치구도를 다시 짠다는 것이다. 그것이 펄의 태생적 모국인 이스라엘을 위한 구도임은 말할 나위 없다.
데이비드 프럼은 전 백악관 대통령의 경제분야 연설문 작성자로 2002년 초 부시의 국정 연두교서에서 '악의 축' 용어를 만들어내는 데 참여한 유대인 네오콘이다. 그의 부인이 친구들에게 "내 남편이 '악의 축' 용어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다가 구설수에 올랐고, 그 무렵 백악관을 떠났다. (프럼은 연설문 초안에 'axis of hate'라고 썼고, 그의 상관인 마이클 거슨이 초안을 다듬으면서 'hate'를 'axis'라고 고쳤다).
백악관을 떠난 뒤로도 부시에 대한 프럼의 충성심은 변치 않아 2003년 1월 『올바른 남자』(The Right Man)를 써냈다. 이 책은 주군인 부시를 "기억력이 형편없고, 때로는 입심이 세고 독단적인 모습조차 보인다(sometimes glib, even dogmatic)"임을 인정하면서도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지녔다"며 부시를 아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저자 프럼은 부시를 외부의 테러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지키는 정의의 수호자로 묘사하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단호하고 성공적이며 대중적인 지도자"로 추켜세운다. 부시가 이라크 사담 후세인을 강력하게 압박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도 주장한다. 『올바른 남자』가 나올 무렵 유대인 네오콘들은 각종 언론매체들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작전의 북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프럼도 자신의 책을 통해 그 대열에 끼여든 셈이었다.
<사진 3> 리처드 펄 국방자문위원. 부시의 일방주의 옹호론자의 대표주자인 유대인 네오콘이다.(AFP 사진)
『악(惡)의 종말: 테러와의 전쟁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에서 비쳐진 리처드 펄과 데이빗 프럼의 세계관은 단순 명쾌하다. 21세기의 미국이 테러의 위협에 노출돼 있는 만큼, 강력한 선제공격이라는 강인한 전략으로 무조건적인 승리(unconditional victory)를 거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펄과 프럼의 시각에서 본 현상황은 테러리스트들과 북한을 비롯한 '악의 축' 국가들이 미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중국이 도전하고 있다.
네오콘인 그들의 판단으로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이라크 침공을 반대한 프랑스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우방국이 아니라 적국(敵國)일 뿐이다. 그들은 단언한다. "우리는 유럽국가들로 하여금 파리와 워싱턴 사이에 하나를 택하도록 해야 한다"(We should force European governments to choose between Paris and Washington.) 아울러 그들은 북한과 이란 등 '지구상의 악'(global evil) 에 대해 미국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 바탕엔 이라크전쟁에서 보여주었던 강력한 미 군사력에 대한 자만감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대외 강경노선만이 미국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노선'이란 주장을 펴는 펄과 프럼은 따라서 부시 행정부 내의 '온건세력'인 콜린 파월의 국무부, 이라크 침공 전야(前夜)에서 때로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던 조지 테닛의 미 중앙정보부(CIA), 그리고 미 민주당 세력을 강력하게 몰아세운다. 심지어 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시니어 부시 대통령의 대외정책이 우유부단했다고 비판한다. 시니어 부시가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막아보려 했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한마디로 이 책은 마치 지금부터 꼭 80년전에 쓰여진 아돌프 히틀러의 문제작 『나의 투쟁』(Mein Kampf)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좌충우돌 도발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라크 침공의 비판론들**
미군 사망자가 곧 500명 선(1월11일 현재 495명)을 넘을 것으로 보이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은 미국 안에서도 그치지 않는다. 반전론자들뿐 아니라, 공신력 있는 연구기관에서도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이 잘못 됐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가장 최근의 것으론 미국의 온건 중도 성향의 싱크탱크인 카네기 재단이 올들어 발표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그 증거와 함축적 의미>(WMD in Iraq, Evidence and Implications)란 제목의 보고서다.
(카네기재단 보고서 http://wmd.ceip.matrixgroup.net/iraq3fulltext.pdf)
조셉 시린사이온을 비롯한 3인의 연구진이 함께 집필한 이 보고서는 무려 1백11쪽의 방대한 분량. 요점은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의 위협을 조직적으로 왜곡 과장했다"는 비판이다. 딕 체니 부통령이 미 CIA를 거듭 방문해 정보판단에 압력을 넣은 사실에 대해서도 이 보고서는 심각한 정보 왜곡 작업의 하나로 파악했다. 미 정보당국이 부시행정부의 정책입안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영향을 받았고(unduly influenced), 이에 따라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지녔을 것이란 '최악의 추론'(worst-case reasoning)에 바탕한 불확실한 결론을 이끌어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비당파적이고 독립적인 위원회를 구성, 이라크 살상무기의 진실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에서 외부로부터의 당면한 심각한 위협이 없는 한 일방주의적 예방전쟁 (unilateral preventive war)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아울러 이 보고서는 결론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바톤 겔만 기자는 이라크 현지에서의 취재를 통해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은 다만 문서 위의 계획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200자 원고지 1백매 가량의 이 심층 기사는 이라크 과학자들과의 연쇄 인터뷰를 통해 1991년의 제1차 걸프전쟁 뒤 이라크 WMD 개발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에 그쳤다고 결론을 맺었다.
( <워싱턴포스트> 기사 www.washingtonpost.com/wp-dyn/articles/A60340-2004Jan6.html)
이례적인 일이지만, 미국의 한 군사대학(Army War College)의 현직 교수도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에 가세했다. 지난해 12월에 작성돼 지난 1월12일 미 육군대학 웹사이트에 발표된 "Bounding the Global War on Terrorism"이란 연구 논문을 통해 제프리 리코드 교수는 "알 카에다의 위협과 이라크 사담 후세인 체제의 위협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하나로 파악하는 기본적인 전략적 오류(fundamental strategic error)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제프리 리코드 교수의 보고서 www.carlisle.army.mil/ssi/pubs/2003/bounding/bounding.pdf)
안보분야 전문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리코드 교수는 논문에서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전략적 오류'라 고 비판했다. "유엔 경제제재와 비행금지 구역 설정 등으로 이라크 사담 후세인 체제에 대한 억제(deterrence)가 가능했음에도 불필요한 예방전쟁을 일으킴에 따라 중동지역에 새로운 테러 전선이 형성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불량국가'(rogue state)가 대량살상무기를 지니는 것을 막기 위해선 이라크 침공 같은 예방전쟁(preventive war)보다는 억제력(credible deterrence) 확보에 치중하고, 그 대신 알 카에다와 그 동맹자들의 위협에 맞서 미 본토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을 우선적인 정책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이 논문의 뼈대다.
2004년말 미 대선의 행방은 아직은 안개 속이다. 최근 미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4만명의 미 유권자를 상대로 면접조사한 바에 따르면, 45.5%가 공화당지지, 45.2%가 민주당지지 성량으로 나타났다. 부시의 당락을 가름하는 변수는 경제와 이라크 상황의 호전(또는 악화)에 달렸다. 오닐 전장관처럼 한때 체제내 세력마저 등을 돌려 반(反)부시전선에 가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카네기평화재단의 비판적 보고서에서처럼 이라크 침공의 흑막이 하나둘씩 드러난다면, 게다가 미국 경제도 비틀거리고 이라크 상황이 (거칠게 말해) '죽을 쑨다면' 부시의 재선은 물 건너갈 게 뻔하다. 그럴수록 부시 행정부는 펄과 프럼같은 네오콘 친위세력들을 동원,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미국은 힘으로 평화를 지킨다"는 선전활동을 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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