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의 한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수닐 세티 교수는 얼마 전 아버지의 고향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큰 감동을 겪었다. 세티 교수의 할아버지는 지금 파키스탄 땅이 되어 있는 라호레 부근의 대지주였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할 때 세티 집안은 종교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천만 난민 틈에 끼어 인도로 옮겨 왔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세티 교수의 아버지는 고향 땅을 다시 밟아 보지 못했고, 최근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되어 일반인의 여행이 허용되면서 인도에서 출생한 세티 교수가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라호레 부근의 펀잡 지역에서는 대지주의 대부분이 높은 계급의 힌두교도였고 소작인은 낮은 계급의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였다. 독립 전의 토지소유와 계층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문제다. 아무튼 세티 집안은 옛 소작인들에게 별로 미움을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티 교수가 나타나자 옛 소작인과 그 후손들인 지역 주민들이 모두 반가워하며 만나고 싶어했다.
그런데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주민들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힌두교도는 음식을 먹는 데 무척 까다롭다. 누가 만들어준 어떤 음식을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제한이 있다. 힌두교의 관점에서 이슬람교도는 불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준 음식을 먹어서도 안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도 안된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주민들은 세티 교수와의 반가움도 식사시간이 되면 거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 세티 교수가 말했다. “당신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싶소.” 이 말을 들은 주민들은 너무 놀라서 잠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 사람은 우리와 식사를 같이 하겠다네!” 하고 소리치자 다른 사람들이 이를 받아 “이 사람은 우리와 식사를 같이 하겠다네!” 하고 소리쳤다. 이 외침은 온 마을로 퍼져나가 얼마 후에는 마을 구석구석의 남녀노소가 모두 만세를 부르며 “이 사람은 우리와 식사를 같이 하겠다네!” 함께 소리치고 있었다.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EHESS)의 클레망텡 교수가 자료수집차 인도에 간 길에 며칠 전 델리의 교수들과 만난 자리에서 세티 교수에게 들었다고 전해 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도 지식인들의 분위기에서 민족 정체성에 대한 그들의 의식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힌두교 연구자인 클레망텡 교수는 식사와 관련된 제약이 힌두교의 핵심적 요소라고 설명하면서 세티 교수의 이야기에 이어 다른 한 교수가 말해준 경험담도 소개했다. 학교시절 이슬람교도인 가까운 친구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식사시간이 가까워지자 친구 어머님이 “얘야, 우리 집에 일하러 오는 저 아주머니는 힌두교도니까 저분께 네 식사는 준비해 달라고 부탁할테니 걱정말렴.” 하셨는데 자기가 “어머님, 저는 어머님이 해 주시는 식사를 같이 먹고 싶습니다.” 했더니 너무나 기뻐하고 고마워하시더라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대립시킨 것은 “Divide and rule” 정책의 표본이다. 인도의 역사를 고대의 황금기와 중세의 암흑기로 대비시키면서 중세 암흑기의 책임을 이슬람 지배에 돌린 것이 영국인들이 퍼뜨린 식민사관의 골자였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힌두교도들은 인도 역사의 모든 불행을 이슬람 탓으로 돌리는 데 길들여졌고, 이 반감이 두 나라의 분리독립으로 이어졌다. 이옥순 박사의 책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푸른역사)는 두 종교 사이의 갈등과 그에 대한 영국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힌두교도로서 높은 계급에 속한 인도 지식인들 사이에 이 갈등의 역사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왜 우리는 이 선량한 사람들과 단순히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괴롭히며 지내야 했던가? 수천만이 고향에서 쫓겨나고 수십만이 목숨을 잃은 분리독립의 비극 속에서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무도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아닌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파키스탄과의 갈등과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는가? 특히 자신이 속한 높은 계급이 갈등 증폭의 주역이었다는 점을 반성하며 계급에서 벗어나려 하고 종교 자체는 지키되 그 정치-사회적 제도에서는 이탈하려는 경향이 지식인들 사이에 늘어나고 있다.
영국인의 식민사관이 힌두교도와 이슬람을 이간시킨 것은 일본의 식민사관이 한국과 중국을 이간시킨 것과 같은 구조였다. 한국과 중국의 수천년 역사 중에는 좋은 측면도 있고 나쁜 측면도 있었을 것인데, 일본인은 ‘사대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전체를 폄하했다. ‘독립’이라는 좋은 이름을 중국과의 관계 정리에 밀어댔기 때문에 합방을 주도할 친일파 괴수가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고 독립문 현판을 쓰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식민사관만이 아니라 근대 역사학 자체가 이웃과의 갈등을 조장하는 불건전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주류 학계가 일본 역사만을 신성화하고 이웃나라들의 역사를 깔아뭉개려 든 것은 어느 식민지배자가 강요하고 유도한 일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를 파국의 길로 몰고 간 일본 역사학계의 편향성은 당시 일본사회의 군국적 분위기 탓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기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만 복무하려는 근대 역사학의 기본성향으로 이해할 측면이 적지 않다.
식민사관만이 아니라 국가주의 시대 역사학의 배타적 성향을 극복하는 것이 세계화 시대의 과제일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남들은 칼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먼저 버리면 버린 사람만 손해가 아니냐고. 그러나 이웃나라를 ‘역사의 칼’만으로 대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불구대천의 관계였던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공동체 안에서 손잡고 지내는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이웃나라 사이의 협력이 증가하는 블록화의 세계 안에서 이웃끼리의 갈등에 발목을 붙잡히고 있는 나라들은 그만큼 불리한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다.
인도에서는 지식인층의 반성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힌두주의가 정치계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영국제 식민사관이 교육계에서 우세를 되찾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식인들은 이것이 정치인들의 이기주의와 편의주의 때문이라고 걱정한다. 우리 사회의 지역감정에서 보듯, 정치인들에게는 대립의 감정처럼 정치 조작에 편리한 도구가 없다. 양심적인 지식인들, 그리고 역사학자들에게는 대립을 해소하고 화합을 찾아가는 길을 사회에 제시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로 주어져 있다. 이 길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 방해를 극복하기 위해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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