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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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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묻는다

<‘창랑지수’를 읽고> 양심적인 자의 조직 내 처세학

소설가 박경범씨가 ‘창랑자수’를 읽고 독후감을 보내왔다. 장장 94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창랑지수’를 총정리하는 의미에서 박경범씨의 독후감을 싣는다. 편집자

중국소설 하면 으레 ‘삼국지’ 등 고전문학이나 김용(金鏞)의 무협지 등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중국의 현대 리얼리즘 소설인 ‘창랑지수’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요즘 해외 무역에 관계하는 사람 치고 중국에 관심 두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은 한 성(省)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큰 곳이 많은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 큰 나라를 운영하며 인민들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꾸려지는가는 궁금하기도 하지만 일반 안내서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책은 지대위(池大爲)라는 중국의 현대를 사는 한 엘리트 직장인... 그렇지만 자신의 이상(理想)에 집착한 나머지 직장 초기의 처세에 실패하여 남들처럼 만족스런 승진을 해보지 못하고 처자식을 근근히 부양하며 살아가던 주인공이, 이윽고 자기 정체성을 희생하고 출세를 추구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지대위는 학생 때와 젊은 시절에는 부친을 본받아 세파에 타협하지 않고 군자와 같은 삶을 살려고 작정하였다. 사회인으로서의 인생 출발 시기의 관문인 결혼에서부터, 일류대학 석사 출신인 자신의 위치에서 최대한으로 맞이할 수 있는 신부감인 대학동창생을 놓치고 그 다음에도 직장에서 소개받은 엘리트 직장여성을 놓친다. 결국은 평범한 간호사이며 남편에게 아무런 욕심을 강요하지 않는 순종적인 여성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러한 아내도 아이가 생긴 뒤로부터는, 남편의 ‘고상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보다 손해본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지대위를 몰아붙인다. 이후 아내는 지대위의 현실타협과 출세지향에 중요한 동반자가 된다.

***소설이자 직장 처세학 지침서**

소설은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직장인 신분의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를 단계적으로 흥미 있게 진행하면서도 그 한 장(章) 한 장이 마치 직장인 처세의 회한을 담은 담백한 수필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조직에서 이익을 받든 불이익을 받든 자신의 인생관을 지키겠다는 주인공 지대위가 “인생에는 무슨 최선의 선택 같은 것은 애시당초 있지도 않고, 어떤 선택이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모든 것의 문제는 자기가 어떤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느냐 하는 데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중간 과정을 거쳐 마침내 현실적인 인간, 돈과 권력에 굴복당하는 인간으로 변해 가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대위는 사회적 성공을 하였다 해도 그것을 사회에서의 승리라고 마냥 자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타락했다는 자책에 빠진 것도 아니다. 실제로 지대위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역할도 개혁을 추구하지만 강직하기까지는 못한 어정쩡한 위치이다.

***우리에게는 찾기 어려운, 충실한 직장인 소설**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자존심과, 대세를 따라야 한다는 조직의 논리와의 갈등은 비단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일반론이다. 지대위는 중국의 성 단위 관청인 위생청에 근무하고 있으나 그가 겪는 갈등은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모든 조직사회의 생활인들에게는 공통된 것이다.

충분히 능력은 있지만 직장의 조직과 갈등을 겪는 샐러리맨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른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 융화되지 못하고 억지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직장인을 주인공으로 한 기업소설 등은 온전하게 발달할 기회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순수문학은 그저 직장인의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허무감을 표현한 정도가 대부분인 것이고 대중문학의 관점에서는 기업소설을 다만 흥밋거리로 만들기 위하여 장면의 불필요한 과장(誇張) 혹은 주제의 단순화가 되어 있어서 진정 인간과 조직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이루어질 기회는 적은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 문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자본주의 시장사회에서 우리의 기업문화에 대한 관점이 너무도 ‘진화’되고 말아 본질에서 벗어난 가지가 지나치게 뻗어난 결과라고 하겠다.

‘창랑지수’와 같은 생활인의 이야기는 우리의 실정에서도 꼭 있어야 할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이 이제까지 이와 같은 기본적인 이야기꺼리를 만족스럽게 정리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는 이미 중심을 떠난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중국사회 자본주의의 미진화(未進化) 상태가 이처럼 개인과 조직과의 관계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왜곡되지 않게 담담히 그려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우리와 공유하는 ‘386’, 인터넷 채팅 문화**

그러면서도 이 작품에서는 중국사회와 우리사회의 공통점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의 대학 동창들은 80년대에 그들 나름대로 애국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운동을 했다. 그들이 90년대에 사회에서 부대끼면서 다시 만나 그날을 감격적으로 회상하는 장면은 중국에도 이른바 386은 있었으며, 인간사회의 돌아가는 섭리는 어느 곳이고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보다 그렇게 늦지 않은 시기에 휴대폰과 인터넷 채팅문화가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의 같은 세대들은 순전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들이어서 시장경제의 문제를 현대사회의 두드러진 새로운 세태조류로 평가하고 있다.

남녀직원들끼리 농담하며 太자를 남자, 呑자를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하체에 口가 있는) 여자로 비유하는 등, 우리 같으면 직장 성희롱으로 문제시될 만한 진한 음담패설들이 스스럼없이 오가고 있는 여러 장면에서 그들 기질의 대범함을 알아볼 수 있다.

지대위의 직장동료들이 승진이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서로 말투와 태도가 바뀌는 갖가지 진풍경은 물론, 지대위의 상사이며 한 때 전 위생청 직원의 경외의 대상이었던 마(馬)청장이란 인물의 세도 당당하던 모습과 퇴직 후의 달라진 모습까지 비교하여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사회에서 마주하는 여러 인간의 이미지란 결국 인간의 본질이 아닌 조직이 만들어낸 인간허상임을 실감나게 일깨우고 있다.

***양심적인 자의 조직 내 성공비결**

이 소설은 순수하고 패기 있는 청년이 결국에는 세태와 타협한다는 회한을 그리는 듯하나, 달리 생각하면 지대위와 같은 양심적인 사람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법을 오히려 가르쳐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니체는 인간을 초인(超人)과 짐승의 사이에 놓인 밧줄 위에 서 있는 존재라고 했다. 전진해도 위험하고, 돌아가도 위험하며, 그대로 있는 것 또한 위험한 존재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것은 그와 같이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개념이다.

지대위는 원래 자신의 부친과 옛 성인들과 같은 고상한 정신적 삶을 지향했었다. 그리고 세상의 작은 명리(名利)를 따라 ‘비굴하게’ 사는 인간들을 개돼지와 같다고 경멸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이 경멸하던 짐승이라고 하는 존재와 자신과 아버지가 갈망했던 신선, 즉 초인과의 중간에 있는, ‘인간 그 자체’가 되고 만 것이다.

인생은 결과는 다 똑같지만(죽음) 그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 안에서의 생존경쟁에서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진정한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인가**

지대위는 위생청장이 된 후 자신이 얻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위생청 재정운용의 공개 등 개혁을 추진하려 한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기존 간부들의 저항으로 포기하는 광경은 만약 이 작품이 국내 작가의 창작물이라면 오해를 살 수도 있을 정도였다.

지대위는 자신의 융통성 부재로 인해 얻은 수년간의 말단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 작심하여, 자신을 죽이고 조직에 적응하여 조직의 정상에 올라왔다. 자기가 이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지위가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명분 삼아 천신만고 끝에 위생청장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가면이 필요 없는 만큼 자신이 품고 있던 이상을 새로이 실현하자는 의욕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로 좌절하고 타협을 해야만 하게 된다. 조직의 장(長)이 되어서도 결국은 이 사회의 대세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었다.

지대위는 자신이 과연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긍정하지 못한다. 인생의 성공이란 것이 단순히 물질적 부를 이룬 것인가 하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애초의 뜻과 가치관을 굽히지 않고 유지하며 살아온 것이 진정한 성공인가... 그것은 독자에게 남겨둔 과제이다.

카프카의 ‘성(城)’이 조직사회의 인간성 말살을 추상적이고 비유적으로 그렸다면, ‘창랑지수’는 이것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연애소설의 대명사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두고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무미건조한 인생을 보낸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창랑지수’의 이야기를 읽고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제까지 인생을 너무 기계적으로 산 사람이거나 아니면 구태여 갈등과 고민을 겪지 않아도 지금의 페이스대로만 나아가면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창랑지수’ 세 권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신선한 각도에서 되돌아보게 하는 이 소설의 재미에 빠져들었지만, 만약에 ‘삼국지’ 혹은 김용의 무협지를 3권 가량 읽으려던 사람이 대신 이 책을 읽을 경우 그 이상의 재미를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장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요즘 흔한 직장인 처세술 서적 3권을 읽었을 경우와 비교한다면 그 재미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깊이 마음속에 와 닿고 오래 남는 직장인의 처세학을 터득할 수 있을 것임을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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