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의식을 공략하는 광고기법을 영어로 Subliminal Advertising이라고 한다. Subliminal이란 의식의 한계(limen)의 아래(sub)라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이 기법은 50년대에 미국에서 아마추어 심리학자가 처음 소비자 심리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면서 상품을 팔아먹는 데 응용되기 시작했다. 그 수법은 수십 년 동안 장사꾼들의 끊임없는 연구개발 노력의 덕분에 갈수록 정교해졌고, 그 연장선에서 등장한 마케팅 수단이 바로 Product Placement(PPL)이다.
한국어로는 'Subliminal Advertising'을 '식역하(識閾下:식역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경계로, 식역하는 무의식을 말함) 광고'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디자인이나 마케팅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쓰는 특수용어일 뿐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일반적으로 통용될 만큼 이러한 광고기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마케팅 제국인 미국에서는 이런 수법이 일반화 된지 오래되어 'Subliminal Advertising' 또는 'Subliminal Message'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생각해 보면 '식역하 광고' 따위의 음흉한 개념이 대중화된다는 것이 뭐 그렇게 부러워할 일이겠냐마는, 현재의 분위기를 보아 한국에서도 미국형 PPL이 판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TV 드라마에서까지 은근슬쩍 배치된 상품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제메키스 감독을 키워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E.T'의 손에 'Reese's Pieces'라는 초코볼을 쥐어줬을 때만 해도 그 상품은 PPL의 개념이 아닌 순수한 작품 만들기의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스필버그는 처음에 가장 유명한 초코볼 상품 회사인 M&M/Mars사에 이 회사의 대표 상품인 M&M's 캔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M&M/Mars사가 이를 '사양'하자 대신 라이벌 회사인 Hershey Foods Corp.의 Reese's Pieces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요즘처럼 모든 회사들이 PPL에 혈안이 되어 있는 분위기 속에서는 이 같은 상품노출 제안을 마다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쨌든 'E.T'가 당대의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덕분에 Reese's Pieces 판매량이 65%나 뛰었고, 이를 계기로 세상은 본격적인 PPL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시네마의 비교적 순수했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때부터 작품과 상품은 마구 몸을 섞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작년에 나온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도요타(렉서스의 모회사)·노키아·펩시·갭·리복 등 굵직한 회사들이 PPL의 대가로 지불한 돈은 줄잡아 1천만 달러가 넘는다. 20년 전 'E.T'에서의 티 없이 맑은 밤하늘의 감동이 아직 남아있는 나에게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제까지 헐리우드산 영화 중에서 작품과 상품의 뻔뻔스러운 결합을 가장 여실히 보여준 영화가 (이것 역시 톰 행크스가 출연한) 'You've Got Mail'(1998)이다. 'Cast Away'에 등장하는 상품들(페덱스·윌슨)이 스토리의 설정상 필수 불가결한 캐릭터라면, 'You've Got Mail'의 문학적 장치로 사용되는 온라인 서비스업체 AOL은 행크스와 맥 라이언 두 주인공을 엮어주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전자우편을 주고받게 하는 가상의 온라인 서비스였더라도 스토리 전개에 하등의 지장을 주지 않았을 테고, 최소한 "영화를 가장한 파렴치한 AOL 광고"라는 비난은 없었을 것이다. (AOL은 세계 최대의 온라인 서비스 업체로 2003년 2월 현재 3천5백만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다행히도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이 회사의 PPL이 한국의 관객에게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을 것이다.)
AOL은 이러한 매개체로서 자사가 실명으로 소개되는 대가로 약 6백만 달러를 제작비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작업 초반부터 뛰어들어 대사의 일부는 물론 제목까지 자사 홍보를 극대화 시키는 쪽으로 바꾸도록 했다.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노라 에프론이 정해 놓았던 제목은 원래 'You Have Mail'이었으나 결국 AOL의 트레이드마크를 그대로 옮긴 'You've Got Mail'로 바뀐 것이다. 이 영화에서야 말로 상품이 작품의 방향을 좌우하는 상업주의의 극치를 볼 수 있다.
'Cast Away'든, 'Minority Report'든, 'You've Got Mail'이든 모두 나름대로 탄탄한 구성을 갖고 있는 작품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작품 속에 숨어 있는 장사꾼의 의도다. PPL이란 상대방에게 권하는 차 한 잔에 몰래 타는 최음제와도 같다. 차를 받아 마시는 사람은 차의 맛과 향기를 생각하지만, 차를 권하는 사람은 차 속에 녹아있는 '약물'의 효과를 노린다. 이런 용도로 쓰이는 약물, 그리고 그 약물을 타는 방법에 대한 연구 개발이 가장 발달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식역하 광고'에서부터 'PPL'에 이르기 까지 기발한 광고기법이 모두 미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는 미국이 마케팅 분야에서도 단연 앞서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지만, 아울러 소비자를 실험용 쥐쯤으로 여기는, 실용주의와 상업주의로 다져진 미국문화의 독특한 토양을 단편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오랫동안 느껴온 미국 문화의 특성은 어떤 덕목(德目)도 언젠가는 교묘하게 포장된 상업주의에 의해 희생되고 만다는 것이다. PPL 같은 '선진형' 광고기법을 도입한다는 것은 이러한 미국식 상업주의 문화에 더욱 동화되어 감을 의미한다.
물론 무조건 타 문화를 배척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는 아니다. 관념적 문화국수주의는 분명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적 상대주의의 견지에서 모든 문화가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다 할지라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른바 PPL 시대의 도래가 어차피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은밀히 약물을 타는 짓도 불사하는 미국식 상술의 도입을 식자들은 두 눈 뜨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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