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모욕하기’의 사례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해둘 것이 있다. 안중근 의사가 평화주의자라는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의 분석이 바로 그것이다.
한상권 교수는 이러한 평가가 사실은 이미 하얼빈 의거 직후부터 나왔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신채호와 더불어 근대적 민족사학의 태두로 불리는 박은식은 1914년 발간한 <안중근전>에서 안 의사를 단순히 민족의 원수를 갚은 지사로 보는 것은 좁은 시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역사(행적)에 근거하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志士)’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한국을 위하여 복수한 ‘열협(烈俠; 義烈士)’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이 안중근을 다 설명하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적인 안광(眼光; 식견을 뜻함)을 가지고 스스로 평화의 대표로 나선 사람이다.”
박은식은 안중근 의사를 “세계적 식견을 가진 평화의 대표”로 평가했거니와,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일제의 침략주의야말로 세계 평화의 적이라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대국적 평화를 파괴한 것은 실제로 이등(伊藤)의 침략주의 때문이다. 그를 죽이게 된 것은 안중근이 세계의 평화를 희망하고 이등을 평화의 공적(公賊)으로 인정하여 그 괴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화를 막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논할진대 안중근은 세계적 안광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평화의 대표를 자임한 자이다.”
박은식이 바라본 안중근 의사의 세계관을 현재적 관점으로 연장하여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부시로 상징되는 미국의 패권주의야말로 세계 평화의 적이라는, 세계 각지의 양심적 석학과 평화운동가들의 통찰력을 안 의사가 이미 한 세기 전에 보여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박은식은 이런 말을 다시 한번 덧붙인 것인지도 모른다.
“안중근이 어찌 한국만을 위하여 복수한 것이라고만 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평화정신이 제대로 일반 국민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안 의사의 유업을 기리는 유일한 합법적 법인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이하 숭모회)의 태생적 한계도 이러한 사회적 현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역대 이사장과 주요 간부의 면모를 살펴보다 보면 과연 숭모회가 안중근 의사의 정신과 부합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숭모회가 설립된 것은 1963년이다. 지난 40년 동안 모두 8명이 이사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민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 정도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친일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역대 독재정권 치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내며 호의호식한 사람들이라는 일부의 평가가 있다.
<사진 1> 안중근을 숭모(?)한 친일파들. 1970년 공화당 당의장 윤치영(오른쪽)이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연두순시 보고를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과거에 독립군을 사냥하거나 일본군을 찬양한 전력이 있다.
ⓒ윤치영 회고록 <윤치영의 20세기>.
심지어는 독재정권에서 인권유린의 선봉대 역할을 도맡았던 정보기관에서 활동한 전력을 가진 사람까지 있다고 하는데, 숭모회의 역대 이사장을 지내거나 주도적으로 참여해온 인사들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윤치영: 임전대책협의회 회원(41), 이승만 비서실장(45~48), 내무부장관(48), 서울시장(63), 자유당ㆍ공화당 국회의원(48~71), 5공 국정자문위원(81).
△이은상: 이화여전 교수(31), 친일잡지 <조광> 주간(43), 시조작가협회장(66), 5공 국정자문위원(81).
△백두진: 조선은행 근무(34~45), 족청 재정담당 이사(46), 재무부장관(52), 국무총리(70), 유신정우회 의장(73), 국회의장(79).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57), 크리스천아카데미 이사장(68), YMCA 재정위원장(68).
△정원식: 문교부장관(88~90), 국무총리(91~92).
△노신영: 외무부장관(80~82), 안기부장(82~85), 국무총리(85~87), 민정당 고문(87).
△황인성: 국방부 재정국장(63~68), 민정당 국회의원(81~88), 국무총리(93).
△안응모: 치안본부장(82~83), 안기부 1ㆍ2차장(88~90), 내무부장관(90~91), 자유총연맹 총재(96~98).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숭모회의 초대와 3대 이사장을 잇따라 역임한 윤치영의 삶이 안중근 의사의 그것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다시 말해 안 의사 가문이 ‘독립투사 가문’의 전형이라면, 윤치영 가문은 ‘친일파 가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안중근 가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안 의사 일가와 후손의 어제와 오늘은 일반인의 예상과 달리 ‘행복’보다 ‘불행’ 쪽에 가까웠다. 우선 안 의사에는 2남1녀가 있었는데, 장남 안분도는 6세 때 사망했고 남은 1남1녀(俊生과 賢生)의 후손들도 대다수가 고국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다. 자랑스런 독립지사의 후손들이 고국을 등진 데는 사연이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이후 안 의사 일가는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만주 등 해외로 뿔뿔이 흩어지는 신세가 됐다. 그 중 친동생 안정근(定根)과 안공근(恭根)은 형의 유지를 받들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해서지역(황해도)에서 토벌군과 동학군 대장으로 맞섰지만 외세에 맞서기 위해 손을 잡았던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泰勳)과 김구의 인연 때문에 두 사람은 백범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안 의사의 마지막 유언을 들으며 독립투사가 된 안정근과 안공근의 자녀들도 대를 이어 김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안정근의 차녀 안미생(美生)과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禹生)이 각각 백범의 맏며느리와 비서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외세를 등에 업은 이승만과 친일파에 의해 백범이 밀려나자 두 사람은 북한으로 가버린다.
안 의사의 백부 안태현(泰鉉)의 장남 안명근(明根), 숙부 안태민(泰敏)의 장남 안경근(敬根), 숙부 안태건(泰健)의 손자 민생(民生)도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안명근이 독립운동 때문에 일제시대에 갇혔던 서대문형무소에 안경근과 안민생이 4.19혁명 이후 통일운동에 나섰다는 이유로 5.16쿠데타 이후 투옥된 것이다. 더욱이 안경근은 일제시대에 투옥 중 탈옥을 했다가 체포돼 발목까지 잘렸던 비운의 인물이다.
그랬던 독립투사 안경근과 그를 옆에서 보좌했던 안민생은 1961년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 재판소는 일본 육사를 나와 관동군 장교로 항일 독립군을 사냥했던 민족반역자였고, 해방 이후 득세하고 있던 남로당의 군사 총책을 맡아 육사에 침투해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도모했던 박정희가 급조했으며,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두 차례나 출마했던 이회창이 판사로 재직했던 곳이다.
이번에는 1945년 이승만 비서실장에서 1981년 전두환 국정자문위원까지 양지만 골라서 살아왔던 윤치영 가문의 역사를 살펴보자.
우선 윤치영의 큰형 윤치오(致旿)와 둘째형 윤치소(致昭)가 10년을 시차로 하여 차례로 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으며, 셋째형 윤치성(致晟)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구한국군 기병중장을 역임했다. 특히 둘째형 윤치소는 1937년 8월 당시 쌀 1백20가마에 해당하는 2천원을 국방 헌금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윤치영 스스로도 이동치영(伊東致暎)으로 창씨개명한 것은 물론이고 임전대책협의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했음은 물론이다.
친형제들만 친일행각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윤치영의 백부 윤웅렬(雄烈)은 구한말에 일본식 별기군 창설을 주도해 좌부령관을 맡고 있다가 임오군란 당시 군졸과 민중들의 습격을 피해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후 갑신정변으로 귀국한 뒤 우여곡절 끝에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의 직위와 매국공채 2만5천원을 받았다.
윤웅렬의 장남이자 윤치영의 사촌형인 윤치호(致昊)도 한때 독립운동에 나선 적이 있으나 전향 이후 노골적인 매국의 길을 걸은 대가로 1945년 조선 내 7인의 일본 귀족 중 한 명이 되었다. 바로 그 천하의 친일파였던 윤치호의 손녀가 현 조선일보 사장인 방상훈의 부인이라는 사실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제호 위에 일장기를 달고 발행했음에도 전시체제의 물자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폐간한 뒤 월간지 <조광>을 확대 개편한 뒤 “한일합방은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행복을 위해 체결한 조약”이라고 보도함으로써 민족에 반역했던 조선일보 등 우리 사회의 수구ㆍ기득권 세력들이 친일파 청산 문제만 나오면 알레르기적 반응부터 보이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적 대목이다.
따라서 안중근 가문과 윤치영 가문은 “항일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치욕적인 금언을 현실에서 보여준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랬던 윤치영이 안중근을 숭모하는 단체의 대표였다는 것이 얼마나 역사에 대한 모독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현 숭모회 관계자들의 인식은 전혀 다르다. 예컨대 윤치영의 친일 부분과 관련해 김영광 숭모회 부이사장은 뉴스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임영신 등과 함께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한 전력이 있는 윤치영을 친일파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반박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치의 타협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초개같이 내던졌던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유업을 이어받기 위해 만들었다는 단체의 간부가 했다는 이런 변명을 들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실제로 안 의사는 순국하기 이틀 전인 1910년 3월 24일 면회 온 두 아우 정근과 공근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윤치영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군의 침략전쟁을 위해 춤추며 만세를 불렀다. 실제로 그는 1942년 <동양지광> 3월호에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함’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글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 세기적 경사를 당해서 더한층 대일본 제국의 위대한 업적과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억일심……총후 국민의 의무를 엄수하고 팔굉일우의 정신을 전 세계에 선양함에 의해서, 대일본 제국의 위대한 사명을 세기적 경축과 함께 발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도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군을 바꿔가며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렸다. 오죽하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인> 제1권에서 윤치영을 “외세와 독재권력에 아부하여 ‘잘 먹고 잘 산’ 자의 표본”이라고 규정했겠는가.
한편 안중근 의사는 죽음으로 남긴 유지를 받들기는커녕 개인의 영달을 위해 거꾸로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박정희의 통치 도구로 이용될 뻔한 적도 있는데,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군인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 성역화 사업을 장기집권 통치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치(文治)를 기리기 위한 세종로(世宗路)에 어울리지 않게 무신(武臣)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반면 세종대왕 동상은 정작 그가 기거하지도 않았던 덕수궁 한 구석으로 밀려난 이유도, 유신시절 학창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반드시 한번 이상은 영화 ‘성웅 이순신’을 관람해야만 했던 이유도 사실은 바로 이러한 독재정권의 이미지 조작 정치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최근 박 정권이 안중근 의사도 통치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러한 비사는 ‘안중근의사숭모회 회장 이은상’이 1979년 5월 21일자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게 보낸 ‘건의서’를 통해 드러났다.
이순신 성역화 사업의 이데올로그로 알려진 이은상은 “각하의 강령하심을 충심으로 축원하옵니다”로 시작되는 이 문서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백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이어서 “이것은 오직 각하께서만 명령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각하의 역사적 영단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직접 현장에서 설명을 드리고 하교를 받잡고자 합니다”라고 탄원했다.
이에 따라 우선 그해 9월 2일 오전 10시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1만여 명의 시민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가 연출됐다. ‘안중근 의사 탄신 1백주년 기념 축전’이라 이름 붙여진 이 행사는 국무총리 최규하가 주재한 것으로 확인됐다. 곧이어 9월 5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는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라는 박정희의 휘호가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졌다.
일본육사를 졸업한 관동군 장교로서 만주에서 독립군을 사냥하며 일제에 부역했던 박정희가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한 안중근 의사를 위해 휘호를 쓴 것도, 사전적 표기인 민족정기(民族精氣)가 아니라 반민특위의 슬로건이었던 민족정기(民族正氣)를 휘호의 내용으로 쓴 것도 역사에 대한 모독이자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행사와 이벤트가 열리기 전에 박정희와 이은상은 이미 “안중근 의사의 위격(位格)을 이 충무공과 동격으로 높이는 성역화 사업”에 합의한 상태였다. 청와대 정무무석 고건, 문공부장관 김성진, 서울시장 정상천 등으로 구성된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 구성도 합의했다. 이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숭모회 인사로는 이은상, 안춘생, 최서면, 이문욱, 전태준 등이 있었다.
양측은 성역화 장소를 두고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정부측은 새로 개발되는 남서울, 즉 강남에 있는 국유지 10만평에 건설하자고 제안한 반면 숭모회측은 남산공원 부지 1만평에 건설하면 충분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이 사업은 박정희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전면 중단됐다. 안중근 의사의 상징적 이미지를 유신시대가 원하는 국난극복(?)과 체제수호의 인물, 즉 국수주의와 파시즘 통치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던 원대한(?) 구상은 그렇게 10.26과 함께 연기처럼 스러졌다.
사실 그것은 사필귀정이었거니와, 안중근과 박정희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안중근은 부친이 세상을 뜨자 가산을 정리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영재를 키우다가 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동지들과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군이 됐다.
그러나 대구사범을 나와 일제가 세운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박정희는 어느날 문득 “긴 칼이 차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서 “진충보국 멸사봉공 일본제국 황국신민 박정희”라는 혈서를 일본 천황에게 바치고 ‘독립군 때려잡는’ 일본군 장교가 된다.
두 사람은 운명적인 공통점도 가지고 있는데, ‘10.26’이 바로 그것이다. 안중근은 그날 아침 의병군 대장으로서 적장을 의롭게 죽였고, 박정희는 그날 밤 주색에 빠져 있다가 개 같은 죽음을 당했다.
우리가 이제 10.26을 ‘박정희의 밤’이 아니라 ‘안중근의 아침’으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 2>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그것은 자신을 단순한 살인자로 몰아가려는 일제에 대한 안 의사의 사상투쟁(思想鬪爭)의 일환이었다.
ⓒ윤병석 교수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이제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
필자는 여기서 다시 한번 ‘안중근 재발견 운동’을 제안하면서 글을 끝내고자 한다.
안 의사는 죽음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던 1909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 검찰관에게 ‘한국인 안응칠 소회’라는 제목의 서면 답변서를 제출했다.
일본 본토에서 자신을 사형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을 알아채고 후세에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분명하게 남겨놓기 위한 방편이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우리는 다음에 소개한 답변서의 일부 대목에서 ‘문명사상가’이자 ‘평화운동가’이자 ‘사회(시민)운동가’인 안중근을 조우하게 된다. 94년 전 그날 오후 2시 30분 안중근은 이렇게 세계 만민에게 목놓아 부르짖었다.
"하늘이 백성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으레 문명시대라고 일컫지마는, 나는 홀로 그렇지 않은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동양과 서양, 잘난이와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하는 것도 사람 죽이는 기계다. 그 때문에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닐 것이냐.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글로 쓰기가 어렵다. 이른바 이등박문은 천하 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 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등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 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평화를 위한 도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달려나가야 할 자 누구인가? 안중근은 죽음으로 물었고, 이제 우리는 답해야 한다.
필자 연락처: ssal@ngo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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