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오늘 벌어진 스당 전투는 그 55년 전의 워털루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 나폴레옹 1세가 참전한 워털루에서처럼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직접 참전한 것이 그렇고 다같이 패배한 것이 그렇다. 하루만에 끝난 워털루 전투처럼 스당 전투도 이틀만에 싱겁게 끝났으나 그것으로 역사가 딴판으로 바뀐 것도 그렇다.
이 전투에서 2일 프러시아군에게 패해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가 4일 폐위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프러시아군이 이 전투에서 이겨 이듬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이 선포되는 등 유럽의 패권이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넘어간 것을 두고 하는 말도 아니다.
이 싸움을 계기로 프랑스에서 완전히 제정이 사라지고 제3공화국이 성립하는 등 세계가 완전히 근대로 접어들었다는 말이다. 그 이듬해 세계 처음으로 노동자 정권인 파리 코뮌이 들어선 것도 그렇다. 그 코뮌을 프랑스군이 침략군인 독일군의 도움을 받아가며 진압하는 과정에서 3만 명이나 죽인 것도 20세기의 이데올로기 전쟁을 알리는 서곡 같은 것이었다.
실은 나폴레옹 3세도 꽤 근대적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본명이 루이 나폴레옹인 그는 나폴레옹 1세의 몰락 이후 각국을 떠돌면서 고생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의 독립과 자유를 내세운 비밀결사 카르보나리에 가입하기도 했고 '빈곤의 절멸'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래서 1848년 2월 혁명 후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임명한 수상 바로는 그를 '마상(馬上)의 생시몽'이라고 했다. 생시몽은 마르크스의 선배 격인 공상적 사회주의자.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이 생시몽이라고 불리는 순간부터, 다시 말해 집권한 순간부터 생시몽과는 반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권력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일 수도 있고 이상과는 다른 현실의 한계로 볼 수도 있다.
그가 대통령의 연임에 반대한 의회를 쿠데타로 제압하고 황제의 길을 걸었던 것은 역시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황제가 된 그의 백부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자로 변신한 것도 나폴레옹 1세를 본받은 것이지만 국민들이 그것을 바라는 현실에 영합한 것이기도 했다.
불행한 것은 그것이 성공적이지 못한 점이다. 그는 스당 전투에서 프러시아군에게 패하기 전부터 프러시아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게 줄곧 외교에서 패했다. 프러시아가 프랑스와 싸우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오스트리아와 싸울 때 그가 속아서 중립을 지킨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중립을 지키면 프랑스가 벨기에를 합병하는 것을 묵인하겠다고 했으나 그것은 문서가 없는 묵계고 설령 문서가 있다 해도 도둑끼리의 문서일 뿐이었다.
실은 보불전쟁 자체도 비스마르크의 꾀에 걸려든 것이었다. 전쟁준비를 해 둔 비스마르크가 고의로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드리자 자신의 실력도 모르는 나폴레옹 3세가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는 망명으로 사라지나 그것이 프랑스에게 슬픈 일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의 쿠데타로 망명했던 빅톨 위고가 20년 만에 프랑스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프러시아 군에게 포위된 파리로 돌아 와서다.
※梁平의 '그 해 오늘은'은 필자 사정으로 연재를 중지합니다.
그동안 집필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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