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심심찮게 언론탄압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국민의 정부에서 언론사의 세무조사를 할 때부터 나돌기 시작한 그 말이 노무현 정권에 와서 더 성행하고 있다. 그런 말이 나돌 때마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들이 있다. 1961년 오늘 혁명재판에서 3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민족일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 해 2월 창간된 이 신문은 5.16까지 약 3개월 간 남북협상 남북간 경제 서신 교류 학생회담 중립화통일 민족자주통일 등 혁신계의 이론을 대변했으나 쿠데타 세력들에게 북한을 고무 동조한 것으로 몰려 신문은 폐간되고 사장인 조용수(趙鏞壽)와 감사 안신규, 논설위원 송지영 등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 뒤 안신규와 송지영은 무기로 감형됐으나 조용수는 그 해 12월 “조국을 위해 좀더 일하지 못한 것과 돈을 갚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남기고 32년의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겉보기에는 3류 신문처럼 조잡한 신문을 꾸려나가기 위해 여기 저기서 빌린 돈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는 돈을 갚지 못하고 갔으나 다른 죄는 없다는 것이 여러 경로로 입증되고 있다. 6.25때 도일한 그가 민단 간부로 재일동포의 북송에 앞장서 반대한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민족일보 설립자금 3810만 환을 주었다는 재일 동포 이영근이 공산주의자라는 주장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일찍이 조봉암의 비서로 있다 진보당에 대한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간 이영근은 조봉암 사형 반대운동을 펴는 등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을 뿐이었다. 재일동포의 북송을 반대한 그는 조총련계 동포들의 조국방문을 선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는 그가 90년 별세하자 정부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한 점이다.
조용수의 사형이 억울한 법살(法殺)이라는 반증은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다. 97년 대선국면에서부터 한나라당의 이회창이 당시 재판에 판사로 참가한 사실이 거론되자 그가 “당시 서울지법 판사 가운데서 연소자순으로 뽑혀 혁명재판부에 말석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내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고 해명한 것도 그렇다.
그 말의 진위를 떠나 한 언론의 법살을 생생히 목격한 그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이라고 한 것은 민족일보 사건이 언론탄압과는 차원이 다른 ‘언론압살’이라고 보아서였을까.
하긴 그 사건은 처음부터 언론과는 무관한 모양새 갖추기나 통과의례라는 주장도 있다.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가 자신의 용공 이력을 의심하는 미국에게 반공의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 바람에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이라는 사시를 내건 민족일보는 말 그대로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몸으로 호소한 채 너무 단명하게 사라졌으나 그 신문은 오늘날도 하나의 화두를 던진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얼마 전까지 ‘민족지’를 자칭하는 신문들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민족일보가 제호 때문인지 새삼 ‘민족지’가 뭔가를 생각게 해서다.
'민족지’는 밥그릇 수가 많은 신문들이 누릴 수 있는 명예로운 호칭인가가. 아니면 민족의 화합에 앞장서는 신문일까. 어느 경우가 옳건 민족을 남과 북으로 가르고 동과 서를 떼어놓으려는 신문들은 그런 이름을 사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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