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오늘 숨질 때의 이주일은 ‘코미디언’ 같지 않았다. 유독 한국에서 일반 연기자와는 다른 광대처럼 차별 받는 연기자로서의 코미디언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그는 갔다. 실은 연기자 같지도 않았다. 전직 대통령들과 당시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은 물론 각계의 명사들이 떼지어 빈소를 찾은 그는 한 시대를 움직인 위인의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실제로 이주일은 시대를 움직였다. 폐암으로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은 뒤 TV광고에서 담배를 피지 말라고 권한 것도 그런 것이다.
그 광고로 한국의 흡연율이 크게 떨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지난해 한국인 남성 흡연이 5% 줄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의 빈소에서는 유난히 담배를 피우자마자 꺼버린 장초들이 많이 나왔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흡연율이 준 것이 이주일의 광고 때문인지 사회 전반에서 흡연을 막는 제도들이 생겨서인지는 알 길이 없다. 고인의 빈소에 장초를 남긴 후배 연예인들이 장례가 끝난 뒤에는 다시 꽁초를 남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남들에게 제발 당신들은 그런 죽음을 피하라고 권하던 그의 모습은 담배를 떠나서 모든 이들에게 쉬이 잊혀질 수 없었다. 그것은 어딘지 ‘살신성인’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기에 이주일은 코미디언이 아니라 순교자나 구도자 같은 모습이었고 인생을 어떻게 마쳐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스승 같기도 했다.
그것은 한국 코미디계의 위상을 높인 것이자 코미디를 보는 한국인의 눈을 높인 것이니 한국의 문화수준을 높인 것이기도 했다. 그는 코미디언들이 파는 웃음의 원자재가 싸구려나 가짜가 아닌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주일의 그런 모습은 무대 위의 순간적인 재치로 얻은 것은 아니라 웃음과는 거리가 먼 눈물의 세월을 거치면서 얻은 것이고 그것은 그의 연기에서도 곧잘 드러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도 단순히 코가 납작한 자신의 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얼굴이었기에 뚜렷한 자질을 가지고도 길거리 약장수 같은 유랑 악극단을 따라다니던 시절 ‘잘난 세상,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그는 얼굴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6.25때 좌익으로 몰려 그의 집안도 꽤 못났고 그래서 숱하게 고생을 했다. 그는 40 가까운 나이에 그것도 77년 이리역 폭발 사고라는 비극 속에서 겨우 매스컴에 이름을 알린다. 당시 이리에서 열린 가수 하춘화 쇼에서 밥벌이를 하던 그는 사고가 나자 하춘화를 업고 뛰었기에 하춘화의 안부를 알리는 기사에서 ‘정주일’(鄭周逸)이라는 이름이 명함을 내밀었으나 일반 대중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이름이었다.
그 정주일이 79년 매스컴을 한번 타자 ‘2주일’만에 스타가 되면서 그는 성을 바꾼다. 그리고 인기의 여세를 몰아 92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직업을 바꾸기도 했으나 그는 ‘못난 세상’을 잊지 않았기에 겸손을 잃지 않았다.
그가 96년 ‘코미디 공부 많이 했다’며 의원생활 4년을 청산한 것은 정치판 자체를 코미디로 지칭한 것으로 새삼 코미디는 무엇이고 코미디언은 누구인가 하는 화두를 던진 셈이었다.
그처럼 우스꽝스러운 정치판을 근엄하고 격조 있는 글로 꾸미고 가리는 언론들은 코미디 극단의 무슨 배역에 해당하는지도 생각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언론의 그런 속임수에 놀아나서 울고 웃고 욕하고 칭찬하는 대중들은 대규모 엑스트라로 보아서 큰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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