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는 골치 아픈 인물들이 더러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과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극단적으로 다른 경우가 그렇다. 물론 냉전시절에는 같은 인물에 대한 평가가 남과 북 사이에 딴판인 경우가 많았으나 그런 것은 골치를 썩일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1398년 오늘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경우는 골치를 썩여도 쉬이 결말이 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부터 그렇다. 일찍이 이성계를 꼬드겨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던 그가 바로 이성계 아들의 쿠데타로 죽은 것은 너무 당연한 인과응보로 비친다. 더욱이 정도전은 그처럼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불교를 배척했으니 죽어서도 칼산 지옥에나 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도전을 아끼는 이들은 바로 그가 죽는 과정 자체에서도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고 보고 있다. 그는 왕자들을 비롯한 공신들의 사병들을 없애는 개혁을 추진했고 그것이 빌미가 돼 바로 이방원의 사병들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정도전을 미워하는 이들이라도 왕자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걸핏하면 난리를 일으키는 풍토가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그의 개혁에는 수긍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에 읽은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흘러드러/ 반천년 왕업이 물소래 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을 무러 무삼하리오”라는 정도전의 시도 골치 아팠다. 뜻은 별로 어렵지 않았으나 고려를 멸망시킨 그가 또 한번 고려왕조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고려의 신하로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낀 것 같기도 해서다.
한마디로 그는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정도전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지 불과 6년 만에 갔으나 그가 거쳐간 흔적은 너무 곳곳에 배어있는 것이다.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주도한 것은 물론 그가 결정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도성의 기지, 궁문의 이름 등에서는 아직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보다 큰 발자취는 그가 찬진한 조선경국전으로 조선의 법제가 정립된 점이다. 그리고 업적이라고 해야 할지 과오라고 해야 할지는 아리송하지만 그가 주창한 억불숭유정책도 조선왕조의 기틀로 자리 잡았다.
그의 억불숭유 이론은 다른 유학자들의 그것과도 달랐다. 그의 스승이자 고려 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목은 이색 등이 사원의 폐해나 승려의 비행을 지적한 것이었다면 정도전은 불교사상 자체를 비판했다. 윤회니 인과응보니 하는 불교사상이 사회생활을 소홀하게 해 유교적 윤리를 지키지 않아 결과적으로 멸륜해국성(滅倫害國性)을 띤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정도전은 그처럼 존중하던 유교적 윤리 때문에 명상과 간신의 두 얼굴로 기억되고 있다. 고려 신하이자 조선 신하인 그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유교의 계율을 어긴 셈이다. 앞의 시가 아리송한 데는 그런 요인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를 위해 다행인 것은 승자의 기록인 왕조실록에서 폄하된 그의 진가가 점차 드러나고 있는 점이다. 최근에 나온 ‘1인자를 만드는 참모들’(이철희 저)이라는 저술에 그가 오른 것도 그런 것이다. 여기에는 루스벨트의 참모 루이 하우 등 서양의 참모 4명과 동양의 참모 4명이 나오는데 동양 그 4명은 중국의 장량과 순욱 그리고 조선의 정도전과 한명회 등 의외의 인물들이어서 눈길을 끈다. 저자는 정도전에게 조선왕조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일 뿐이고 그의 진정한 목표는 민본개혁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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