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오늘 중국과 베트남이 국경에서 유혈충돌을 벌인 것을 두고는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도 싱겁다. 중국이 대륙을 통일한 1949년부터 베트남이 통일되기까지 26년 간의 혈맹이 불과 3년 사이에 서로 총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영원한 우방’이라는 말이 너무 객쩍어서다.
중국은 사회주의 형제국인 소련과도 총격전을 벌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꽤 오랜 입씨름 기간을 거친 뒤였다. 그러나 중국과 베트남은 느닷없이 총질을 벌인 것만 같았다. 물론 베트남이 통일된 뒤 중국과 국경문제 등으로 마찰이 있다는 보도는 있었으나 베트남 공산화를 못마땅해 하던 서방언론의 ‘희망적 보도’ 정도로 보던 시점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날의 총격전은 이듬해 2월에 양국이 벌인 본격적인 전쟁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우발적인 충돌도 아니었다. 3천㎞의 국경선을 지닌 두 나라는 너무 오랜 전쟁의 소지가 많았다. 실은 두 나라가 힘을 합해 서방세력과 대결한 한 세대는 두 나라의 2천년 가까운 대결의 역사에서 극히 짧은 예외였다. 이데올로기 전쟁이라는 20세기의 유행에 따른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정신 없이 싸우던 두 나라는 전쟁이 끝나자 비로소 상대가 보였다. 중국에게 그 나라는 오월동주(吳越同舟)로 유명한 월나라의 남쪽 나라(越南)이자 전한의 무제가 BC 111년 정벌한 나라이기도 했다. 그러다 당나라 말기 어수선한 틈을 타 938년 독립하기는 했으나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번주국이었다.
그러나 1858년 프랑스가 베트남에 진출하면서부터 두 나라는 까마득히 멀어진다. 아편전쟁으로부터 16년 뒤인 그 무렵의 중국은 번주국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네 본토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세기동안 서풍에 휘둘리던 두 나라는 차례로 해방을 이룩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낯익은 이웃이었다. 중국에게 베트남은 지난날의 조공국이자 해방전쟁 기간 그들이 도와준 ‘사회주의 형제국’이니 형은 그들의 차지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거꾸로 베트남에게 중국은 오랜 항쟁의 대상이었다. 중국 후한의 대표적인 명장인 마원이 베트남의 반란을 평정해 명성을 얻었듯이 베트남의 많은 동상들도 중국과의 항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의 것이다. 그리고 서풍이 물러간 것은 그런 중국이 다시 지난날의 그런 이웃으로 복귀함을 뜻하는 것일 수 있었다.
그것도 19세기에 그들이 헤어질 때보다 훨씬 각박한 이웃이었다. 청나라 말기인 당시 두 나라의 인구는 지금의 10분의 1 가까운 수준이어서 영토에 대한 관심도 크지 않았으나 다시 만난 두 나라는 크게 불어난 인구로 울타리 싸움이 그칠 수가 없었다. 당시는 피차 거들떠 보지도 않던 남중국해의 남사군도를 두고 두 나라가 싸우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런 울타리 싸움에다 중국의 오랜 전략인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원리가 겹쳐 더 시끄러웠다. 소련은 중국의 저편에 있는 베트남과 친하고 중국은 베트남의 옆에 있는 캄보디아와 한편이었던 것도 그런 것이다.
소련의 멸망으로 그런 요인이 사라지자 1995년에는 미국이 베트남에 접근해 중국을 포위하려 하고 이에 중국은 서둘러 베트남과 화해해 이듬해는 16년 만에 중국과 하노이를 잇는 철도를 재개통하기도 했다. 오월동주가 아닌 중원동철(中越同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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