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오늘 소련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다. 소련의 개방과 개혁을 막기 위해 19일 탱크를 앞세우고 모스크바를 점령한 수구파 공산당 간부들과 군인들의 집권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린 셈이다. 실은 그 탱크 위에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올라서서 쿠데타를 비난했으니 3일 천하라는 말도 무색하다.
그래서 소련 장군들은 아프리카의 하사관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지난날 아프리카에서는 곧잘 하사관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들도 소련 장군들보다는 야무지게 일을 처리했다. 그들이라면 당장 옐친을 죽이거나 가두어 탱크 위에 올라갈 틈도 주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이 어렵더라도 그의 연설이 TV를 통해 전세계에 전파되도록 방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병정놀이 같은 그 쿠데타도 역사를 바꾸었다. 쿠데타는 싱겁게 끝났으나 소련은 3일 전의 그 소련이 아니었다. 국가 원수인 소련 대통령은 여전히 고르바초프였으나 국정의 주도권은 러시아 대통령 옐친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러시아 대통령이 국정을 좌우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이 소련 대통령은 마치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면 5.16 이후 국정을 좌우하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에게 별이나 달아 주던 윤보선 같기도 했다. 그래선지 쿠데타와 함께 급작스레 권좌에 오른 옐친은 경위와 상관없이 쿠데타의 주역 같았다.
문제는 그 주역이 무능한 점이었다. 정치가로서 무능한 정도를 떠나 알콜 중독증세를 보면 금치산자 같은 데도 있었다. 물론 쿠데타군의 탱크에 올라가는 식의 용기는 있었으나 그런 즉흥적인 용기는 지도자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쿠데타라는 극적인 상황에서 옐친의 극적인 제스처가 세계의 이목을 끌어 그가 영웅으로 부각된 것은 쿠데타의 숨겨진 비극이었다. 오랜 동안 개혁과 개방의 철학을 다져온 고르바초프 대신 즉흥적인 민주투사가 소련의 권좌에 오르게 됐으니 쿠데타는 막았으나 쿠데타의 비극은 막지 못한 셈이었다.
실은 그가 쿠데타를 한 몸으로 막았는가를 두고도 논란이 많다. 당시 군인들이 옐친을 방치한 것은 그의 용기에 압도되거나 그의 연설에 감동을 받아서라기보다는 그들도 이미 개혁과 개방만이 살 길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서였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그 쿠데타를 막은 것은 크림반도의 별장에서 휴양하다가 군인들에게 붙들려 변변히 손을 쓰지도 못한 고르바초프였다.
그 쿠데타의 보다 큰 비극성은 당시 서방세계가 보여준 태도였다. 쿠데타가 일어나던 날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V인터뷰에서 “소련의 새로운 체제와 함께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쿠데타 주역인 야나예프 부통령을 ‘새로운 지도자’라고 부른 것은 다소 극단적인 경우였으나 서방의 어느 지도자도 쿠데타를 역사의 반동이라며 크게 비난하지 않았다.
실은 당시 서방세계가 고르바초프라는 거인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아 경제지원도 인색했고 그것이 쿠데타를 불러왔다는 말도 있다. 그런 와중에 옐친은 집권했으나 그가 물러나면서 권좌에 앉힌 푸틴이 옐친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고르바초프만 전직대통령으로 예우하며 자주 조언을 구한다는 소식이다. 원래 고르바초프는 “역사는 변덕스럽지만 결국은 정당하다”고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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