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오늘 네델란드에서 태어난 마르가레타 젤레는 평범한 여자아이 이름이다. 그러나 1917년 그가 프랑스에서 총살형을 당할 때 지닌 이름 ‘마타 하리’는 여간첩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살아 요긴하게 쓰인다. 요란한 여자 간첩사건이 생길 때마다 신문들은 고민할 것 없이 ‘XX판 마타 하리 사건’이라는 브랜드만 붙인다.
지난 5월 미국에서 중국계 여류사업가 카트리나 륭(중국명 陳文英)이 미국과 중국의 이중간첩으로 기소되자 신문들이 ‘중국판 마타 하리 사건’이라고 떠든 것이 그렇다.
1차 대전 이전의 파리에서 나체에 가까운 몸으로 춤을 추어 사교계를 뒤흔들던 무희와 서적상 등 사업을 하는 49세의 중국여인은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이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타 하리’가 인도네시아어로 ‘새벽의 눈동자’나 ‘태양’이라는 뜻이듯 마타 하리도 스스로 동양인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는 집안이 어려워 19세에 인도네시아에 파견된 네델란드 장교가 신문에 낸 구혼광고를 보고 결혼을 해 6년 간 인도네시아에서 살았을 뿐이다. 그래서 두 아이를 낳았으나 이혼해 1902년 파리에서 밥벌이 삼아 술집 같은 데서 춤을 추면서부터 동양인으로 행세한 것이다.
그는 순수한 유럽인으로는 드물게 머리가 검은 점을 이용한 것이다. 세기초의 유럽에서는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 컸기에 그는 유럽의 평범한 미인이 아니라 자바의 귀족 태생 미인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는 네델란드 출신인데다 인도네시아 체험도 있었기에 파리의 사교계를 속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만 속인 것이 아니라 ‘발리 춤’이라는 정체불명의 스트립쇼를 개발해 그 유명한 물랭루쥬 춤판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그의 몸을 구경하기에 바빠 그 말이 사실인지를 규명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파리에 몰려드는 유명한 명사들과 염문을 뿌렸으나 막상 그 자신은 크게 실속을 차린 것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덧 40을 바라보게 돼 파리에서 한계를 느낀 그가 1914년 베를린으로 간 것은 메이저리그에서 마이너리그로 옮기듯 서글픈 일이었으나 그것만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곧 1차 대전이 터진 바람에 네델란드로 돌아온 그는 얻은 것 없이 간첩으로 감시만 받다가 우여곡절끝에 프랑스에서 체포돼 사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마타 하리는 독일에서 간첩 제의를 받은 적은 있어도 활동을 한 적은 없다. 프랑스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는 그가 무리하게 프랑스에 간 것도 전쟁으로 부상당한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타 하리는 20세기 내내 섹스를 무기로 한 여간첩의 대명사로 불리다가 세기말인 1999년 영국 정보부(M15)의 기밀문서가 해제됨으로써 누명을 벗게 됐으나 그것은 반갑기보다는 쓰라린 것이다. 그것으로 ‘젤레’라는 한 억울한 사형수의 억울한 사연은 다시 쓸 수 있게 됐으나 세계인의 머릿속에 박힌 ‘여간첩 마타 하리’라는 보통명사를 지울 수는 없어서다.
뉴 밀레니엄에 일어난 카트리나 륭 사건에도 ‘마타 하리’라는 브랜드가 쓰이는 것이 그렇다. 실은 그 사건도 미국이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전술이라는 분석이
나돌고 있다. 간첩들의 수도 무섭지만 그런 간첩들을 바둑돌처럼 버리기도 하는 정치의 수는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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