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어린이는 쉽게 배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어린이는 쉽게 배운다?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13> 영어이야기 5

영어 쓰는 나라에 가서 살면 유치원 다닐 나이의 아이는 일주일, 초등학생은 한 달, 중학생은 석 달이면 말하는데 문제없다고 들었다, 서울서. 누가 그런 말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우리 아이는 만으로 8살 반에 이곳에 왔다. 들은 말이 있어 그냥 한 두달 지나면 영어문제는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달 지난 뒤 아이는 우리나라 책을 학교에 가지고 가서 읽어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유는 선생님이 책 읽어주는 시간에 너무 지루하고 졸리다는 것이다.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 앉아있는 것이 고역이겠지, 물론.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달랬다.

7월 말에 여기에 와서 두 주 다니니까 두 주 방학이 되고 그리고 다시 10주 다니고 한 달 반 방학 기간을 거쳐 학년이 바뀌었다. 개학 전날 아이가 나에게 부탁을 했다. 자기가 영어를 아직 못하니까 선생님에게 숙제내주지 말라고 말해달라고. 그러마고 그 다음 날 개학 첫날에 가서 선생님께 아이가 원하는 대로 말을 했다. 선생님의 대답은 No Problem. 그러나 나는 속으로 Yes problem 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이곳에 데리고만 오면 영어를 저절로 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구나 싶고. 언제 아이가 영어를 이곳 아이만큼 할 수 있으려나, 이곳 아이와 똑같이 영어를 할 수 있게 되기는 하려나. 다른 한국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영어 과외를 시켜야 하나 등 생각이 참 복잡해졌다.

서울서도 안 시키던 과외공부를 여기서 해야 하나 고민만 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보다 큰 아이, 작은 아이가 있는 이웃 엄마가 큰 아이 중학교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선생님에게 아이들 과외를 시키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 아이를 함께 시켜도 좋다고 해서 곁다리로 붙어서 공짜로 공부했다. 한 달 정도로 끝이 나긴 했지만. 그러고 나니 왜 우리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는 ESL 시간이 없을까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서 알아서 가르치면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을텐데. 나같은 부모의 요구가 있었는지, 아니면 이민 온 학생들이 점차 늘기 시작해 학교에서 필요를 느꼈는지, 학교에서 방과 후 교실을 빌려주고 가르칠 선생님도 주선해주는 대신 학부모가 그 교습비를 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옳다구나 하고 신청했다. 나이가 지긋한 부부 선생님이었는데, 아이가 한 달 하더니 별로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그 공부도 끝이 났다. 나도 아이도 과외를 하는데는 영 취미가 없어 이것이 공식적인 영어과외의 마지막이었다.

텔레비젼을 보면 듣기에 도움이 된다던데 우리 아이는 텔레비젼도 보지 않았다. “안 보니?” 하면, “재미없어서 안 봐.” “만화영화를 보면 되잖아,” “만화영화에도 말이 나오잖아.” “그러면 ‘톰 앤 제리’는 말 안나오니까 그거라도 보면 안되겠니?” 이쯤 되면 내가 아이에게 텔레비젼 보라고 권하는 의미가 뭔지 헷갈린다. 대사가 없는 톰앤 제리를 보아 듣기 연습이 될 리가 만무한데.

그랬는데, 1년 반 되던 방학, 아이에게는 두번째 긴 여름 방학 때 갑자기 텔레비젼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하다 못해 에어로빅, 요리강습까지 보면서 하루종일 텔레비젼에 붙어 살았다. 갑자기 들리기 시작한 모양이다는 감을 잡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테이프를 사다 주었다. 그 영화를 지금까지 100번은 보지 않았나 싶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지금은 일년에 한 두번 보지만 처음에 어느 날인가는 하루종일 3번을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 심각하게 앉아서 보는 게 아니라 먹을 것 찾아 먹기도 하고 다른 놀이도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장면만 들여다 보아가면서. 어쨌거나 그렇게 보더니 얼마 후에는 대사를 그대로 동시에 따라하면서 좋아했다. 이래서 영어 듣기는 온 지 1년 반 지나 나의 염려에서 벗어났다.

그 다음 걱정은 읽기였다. 50권짜리 전집을 사주어도 일주일이 못 가서 다 읽어치우고는 다시 새 책 타령하던 아이였는데, 물론 한국말 책은 여전히 읽고 있지만 영어 책은 손도 안 대었다. 생각해보니 영어책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박완서의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딜 갔을까’를 재미있다고 읽는 수준으로 그만한 수준의 영어 책을 읽을 실력은 안되고 영어로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책은 시시하니까. 영어 공부를 저절로 할 줄 알고 이곳에 데리고 왔는데, 그나마 잘 읽던 책마저 손을 놓게 만들었나 싶어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한국 책도 읽고 읽고 또 읽고 지겨운지 책 안보는 날이 슬슬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보거나 말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려와봐도 “재미없어,” 그 한 마디면 끝이었다. 책이 재미없으면 읽기 싫은 것은 자명한 이치, 공부하라고 다구칠 줄 아는 능력이 없는 나는 책읽으라고 닥달하는 실력도 없었다. 그 전에도 자기가 좋아서 책을 들이판거지 내가 읽으라고 한 적이 없었으니. 그래도 꾸준히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나는 아이 책을 고르고 아이는 또 재미없는 책 고르나보다 하는 표정으로 빙빙 돌더니 어느 날인가 잡지 칸에서 말에 관한 잡지를 들여다 보길래 옳다구나 하고 그 잡지를 있는 대로 다 빌렸다. 스무권 가까이 빌려온 잡지를 들고 들어가서 십분도 안 되어 다 보았다고 내놓는 아이를 보고 “어떻게 벌써 다 보았니?”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의 대답, “사진만 보았어.”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 사진이라도 봐라 하는 심정으로 말에 관한 잡지는 모두 빌려다 주었다. 영국 미국 호주에서 들어오는 잡지의 종류가 많아 다행이었다. 다 읽었다고 집어던지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사진 밑에 캡션을 읽고 제목들 정도를 읽어보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인가 70-80페이지짜리 페이퍼 북을 하나 들고와서 빌리자고 했다. 포니클럽을 중심으로 여자아이들의 우정과 경쟁을 그린 시리즈 물인데, 그 때 벌써 5,60권째 나오고 있는 인기있는 책이었다, 말 좋아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 책을 처음에는 어렵사리 일주일쯤 걸려서 읽어냈다. 같은 작가의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쉬어진다. 왜냐하면 한 작가가 구사하는 단어의 양과 늘 사용하는 단어군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아이의 책 읽는 습관이 다시 살아났는데, 그 시리즈를 1번부터 있는 대로 빌려와서 읽어 제끼기 시작하더니 새로 나오는 책을 사서 모으는 게 일이 되었다.

워낙 도서관 이용이 쉽기 때문에 서울서 상당 부분 차지했던 이이의 책 값이 전혀 들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던 나는 조금만 기다리면 도서관에 들어올 텐데 그걸 못 참고 용돈을 다 털어 그 책을 사 모으는 게 아까왔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책을 보는게 고마와 말을 못했다. 8년 전에 30권 정도 사 모은 그 책을 아직도 우리 아이는 간직하고 있다, 가끔 중고 책방에 팔까 말을 하면서도. 나도 그 책이 우리 아이에게 다시 읽는 즐거움을 준 책이기 때문에 감히 팔아버리라고 말을 못하고.

그 시리즈물을 하나씩 기다리는 사이에 내가 빌려다 준 책이 엄청나다. 처음에는 무슨 책을 빌려야 하나 하고 고민을 좀 했다. 아이들 책 서가를 왔다갔다 하다 보니 우리 아이가 한국에서 번역본으로 읽었던 책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런 작가들이 쓴 책을 쓸어다 주었다. 한국에는 보통 한두권 번역된 작가의 책들이 열 몇 권씩 넘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서가 한 줄을 거의 다 빼내어왔다. 이런 책들을 실컷 읽고 우리 아이 하는 말,

“엄마, 한국 말로 쓴 책은 한국 말로 읽어야 하고, 영어로 쓴 책은 영어로 읽어야지 번역된 것 읽으면 안 되겠어.”

“왜?”

“너무 많이 빼먹고 번역을 했거든, 적당히, 그래서 재미가 없어.”

그 말을 들으면서 난 현암사에서 ‘헨리와 말라깽이’라는 책을 그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신영이라는 아이가 번역하여 출판한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우리 아이도 그 책을 쓴 비버리 클리어리의 책을 몽땅 적어도 열번씩은 읽었다.

내가 아는 작가들 책이 더 이상 남아 있질 않아 그 다음에는 서가 A 칸 부터 차례로 뽑아다 빌려주었다. 물론 빌려다 준 책을 우리 아이가 다 읽은 것은 아니다. 앞에 몇 장 정도 읽어보고 재미없으면 집어던진다. 그러다 보니 나도 우리 아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책 표지만 보면 대충 알게 되었고, 또 내가 읽히고 싶지 않은 내용의 책은 아예 빌려오지도 않았지만 아이가 읽지 않고 던지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책 아니라도 얼마든지 책을 빌려다 줄 수 있으니까. 이 부분이 내가 뉴질랜드에 사는 것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다.

아이의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 못해 가속이 붙어 방학에는 하루에 4,5 백 페이지 되는 책들(이미 아동물을 지나 청소년을 위한 서가에서 빌려온)을 한 권 반 정도씩 읽어제꼈다. 제발 그만 읽고 자라고 사정을 하거나 책 한 권만 읽고 오늘은 그만 보라고 야단하는 것이 일이 되었다. 그렇게 2년을 읽었더니 도서관에서 더 이상 빌려올 책이 없어졌다. 또 좋아하는 책은 이미 열번 이상 읽었으니 총권으로 따지면 500권은 족히 넘었다.

그 정도 읽었으면 쓰는 것이 문제없어야 하는데, 한국으로 쳐서 중 1에 아직 가끔 시제가 틀린다거나 하는 등 완전하지가 않았다. 선생님과 면담하는 날 내가 그 걱정을 했더니, 선생님 하는 말,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도 말을 멀쩡히 하면서 글쓰는 것은 엉망으로 한다, 그러니 걱정말라, 너희 아이는 문제가 없고, 아직 당연히 그럴 나이이다라고. 그 말이 조금 위로가 되면서도 아직 글을 쓰는 데 틀리는 게 있다는 것이 우리나라 수준으로는 영 아니올씨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말을 믿고 점차 문법적으로 틀리는 일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해 줄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책을 읽고도 아이가 글을 쓰는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로도 글은 아무나 잘 쓰는 것이 아니니까라는 것이 기껏 내가 스스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아이 방을 청소하다가 방바닥에 흩어져있는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학교 숙제로 쓴 단편 소설인데, 아, 이제는 나의 수준을 넘어간 정도가 아니라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곳에 아이가 가버렸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내가 글을 쓰면 아이에게 proofreading을 부탁한다, 여전히 틀리는 관사와 전치사 등을 고쳐달라고. 내가 처음에 이곳에 오면 아이의 영어가 자유로와지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6개월이 이렇게 4년 걸렸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이.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