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오늘 영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대전이 일어난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이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이라며 반대해 온 독일 사회민주당이 바로 이날 정부의 전쟁노력을 적극 지지하기로 하고 군사예산에도 찬성한 점이다. 그래서 생겨난 ‘성내평화’(城內平和:Burgfriede)라는 낯선 평화도 심심찮은 볼거리였다.
사회주의자들의 눈에 1차 대전은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의 저격으로 죽을 때부터 예정된 코스를 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한달 간 뜸을 들이다 마침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프랑스와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에 서고 독일은 오스트리아 편을 든 것도 마치 오랜 무대연습을 한 배우들 같았다.
실은 사라예보의 총성이 들렸을 때도 세계는 ‘그럴 수가’ 하며 놀라기보다는 ‘끝내…’라는 반응이었다. 그것은 19세기말부터 형성된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라는 두 먹구름이 마침내 부딪쳤을 뿐이다. 여기에 영국이 끼어든 것도 1871년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로부터 대륙의 주도권을 뺏고 독일 제국을 세울 때부터 걱정스러웠던 일이었다. 다만 명상 비스마르크는 영국과의 마찰을 피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그가 실각되자 독일과 영국은 제국주의 무대에서 마주 달리는 기차일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자들이 그 2년 전인 1912년 바젤의 제2 인터내셔널에서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으로 반대한다는 결의를 한 것도 이를 내다본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독일은 물론 유럽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에 참가하고 말았다. 그래서 어제까지는 온갖 사회주의 국제 모임에서 우의와 협력을 나누던 ‘동무’들이 오늘은 참호에서 총알을 주고받게 됐다.
무솔리니가 극좌에서 극우로 돈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원래 사회주의자의 아들인 그는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전진)의 편집장을 지내는 한편 리비아 전쟁에 반대해 5개월 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1차대전도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몇 달 뒤에는 참전파로 돌아 당에서 제명됐고 그에 따른 반동 때문인지 무솔리니는 그 해가 가기 전에 ‘참전을 위한 파쇼(결속)’을 결성했으니 2차대전의 씨앗은 바로 1차대전 초에 뿌려진 셈이다.
무솔리니는 입으로만 민족주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선에 참전해 부상을 입기도 했으니 가상한 데도 있다. 실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어렵고 실감이 나지 않은 데 비해 어려서부터 읽는 민족주의적 신화와 서사시는 누구나 피를 끓게 했던 것이다. 바로 그래서 유럽의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이 반전을 해서는 득표를 할 수 없어서 노선을 바꿨다고 한 것도 터무니없는 변명은 아니었다.
그래도 독일 사민당의 여전사 로자 룩셈부르크는 끝까지 전쟁을 반대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체면을 살린 셈이나 그는 1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1월 패전한 독일군에게 죽고 만다. 그래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혐오하지만 사회주의가 광야의 외침 같은 설교라면 민족주의는 본능 같아서 아직 사라질 기미가 없다. 바로 1차대전의 현장인 유고의 경우 반세기 가까이 정부의 사회주의 설교를 들었으나 그것은 쉬이 잊어버리고 ‘인종청소’는 손에 잡힌 듯 익숙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또 다른 어려움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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