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선 국면에서 노무현의 장인이 6.25때 좌익으로 벌인 활동을 둘러싸고 시끄러운 논쟁이 벌어진 것은 놀라웠다. 자칫하면 빨갱이의 딸이 퍼스트 레이디가 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죄가 아닌 친족의 죄로 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연좌제가 폐지된 지 20년이 넘었으나 그것은 문서상의 일일뿐 아직도 실생활에서는 버젓이 살아 있어서였다.
그러고 보면 1980년 오늘 국보위(국가보위 비상대책위)가 연좌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국민들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두 달 전 광주에서 친족이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들도 수없이 죽고 붙들려 간 기억이 생생해서였다. 국보위의 그 결의에 따라 5공 헌법이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12조 3항)고 해도 실감이 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2.12와 5.17을 거쳐서 태어난 보수 반동적인 5공 군사정권과 연좌제 폐지가 너무 걸맞지 않아서였다.
연좌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권자의 통치수단으로 널리 활용돼 왔지만 어딘지 씨족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보수적인 발상이다. 그래선지 아직도 보수정권이 지배하는 데다 내정이 불안한 나라에서는 “삼족(친족 외족 처족)을 멸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연좌제가 행해지고 있다.
연좌제는 직계가족이나 친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대종이나 그렇지 않은 방식도 많다. 전국시대 상앙(商鞅)이 도입한 유명한 십오지제(什伍之制)도 친족이 아닌 주민을 10인이나 5인씩 묶어 그 가운데 하나가 범법을 하면 연대책임을 묻는 제도였다. 따라서 연좌제의 핵심은 죄 없는 이를 처벌하는 것이고 지난날 군대의 연대기합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발상은 같은 것이다.
연좌제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됐던 것이 분단 상황에서 슬며시 생겨난 셈이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사라진 적이 없었다. 바로 갑오경장 직후에는 갑오농민전쟁에 참가한 사람의 가족들이 연좌제로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일제치하에는 독립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들이 상앙의 십오지제 같은 조직으로 묶여 연대책임을 지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연좌제를 폐지한 5공의 박종철 사건도 그런 것이다. 그는 수배중인 운동권 선배와 아는 사이라는 '죄‘만으로 끌려가 물고문을 당한 것이다.
연좌제가 무서운 것은 그런 형사적인 처벌에 국한되지 않은 점이다. 지난날 백정의 후손들은 직접 간접으로 연좌제의 피해자인 셈이다. 보다 넓게는 특정 지역 주민을 싸잡아 우스꽝스러운 광신도나 배신을 일삼는 이기주의자로 매도하는 풍토도 그런 것이다.
그런 풍토는 지난날 선진국에서도 볼 수 있었으나 한국의 경우는 언론이 이를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조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교통이 날로 편리해 지역의 특성이 사라지는 것을 걱정해야 할 시대에 오히려 지역감정을 걱정하게 됐고 그 근저에는 연좌제적인 발상이 깔려 있다.
지난해 대선에서 노무현의 장인을 둘러싼 논쟁은 새삼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생각게 했다. 좌익활동에 직접 관여했던 박정희가 대통령을 지낸 지도 오래 된 마당에 반세기전 장인의 활동을 두고 입씨름이 벌어지는 것은 재미있었으나 그것이 심각한 일이라는 듯 신문들이 대서특필한 것은 암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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