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오늘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는 관계자들에게 “나에게 죄가 있다면 정치활동을 했다는 것밖에는 없소. 그건 그렇고…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 잔 주시오”라고 했으나 술 한 잔도 얻어 마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 망우리에 묻힌 그의 비석에는 아무런 비문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순간의 야속함 때문은 아니다. 정치활동을 한 죄밖에 없어도 죽어야 했던 죽산은 ‘조봉암’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위험한 폭발물질 같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기에 교도소 관계자들이 술 한 잔 값에 인색했다고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눈을 감기 전에 이미 수많은 진보적 청년들이 그 이름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것을 보았으나 그가 간 뒤에도 그 이름으로 피해를 본 이들은 있었다. 그가 간 이듬해 그를 죽인 자유당 파쇼 정권은 물러났지만 바로 다음해는 군사 파쇼 정권이 들어서면서 역시 공산주의자로 몰려 희생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의 경우도 그렇다. 재일동포인 그는 일본에서 조봉암 구명운동에 앞장섬으로써 5.16 직후의 군사법정에 섰을 때 ‘용공’ 항목이 하나 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이렇다 할 좌익활동을 한 적이 없는 조용수가 죽은 것은 아니다. 공산당 전력이 있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미국은 불안해했고 이에 박정희는 미국을 달래기 위한 반공 제스처로 조용수를 용공으로 몰아 죽였다는 것은 이제 정설처럼 돼있다. 하지만 반공의 실적보다 구색이 문제였다면 조용수가 조봉암 구명운동만 하지 않았어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남북화해를 위해 노력한 것에 비해 용공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은 별로 없어 그를 죽여도 반공으로써 크게 생색이 크게 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새삼 반세기 가까이 지난 일을 두고 부질없는 가정을 늘어놓는 것은 조봉암과 조용수가 너무 비슷한 데가 있어서다. 두 사람이 ‘조’씨로 한글종씨라거나 다같이 법살(法殺)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민족의 화해라는 너무 당연한 일을 너무 일찍 앞장섰기에 피해를 본 것이 더 그렇다.
최근 들어 두 사람의 명예는 얼핏 회복된 느낌이다. 죽산의 고향인 강화 역사관에 2000년 7월 세워진 추모비의 비문도 그렇다. “선생께서 가신 지 42년만인 2000년 6월 15일 남북의 지도자가 손을 잡고 평화적 통일과 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으니, 이는 선생의 염원이 현실화되는 첫걸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죽산의 묘소에 있는 비석은 아직도 비어있고 그것은 죽산이 저승에서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는 셈이나 우리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말을 들어 줄 수 없는 형편이다. 달리 말하면 간첩으로 몰려 죽은 죽산의 억울한 명예가 회복돼야만 그 비석에 뭔가를 써넣을 수 있으나 아직 그것도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실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죽산의 비석처럼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미워하는 이들도 많고 그들은 무섭다. 그들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죽산의 가묘가 조성됐다는 말을 듣고도 좋다 싫다 말이 없다. 그래서 조봉암과 비슷한 노선을 걷다 역시 사형을 당할 뻔했던 김대중이 대통령을 하고 물러나도 그 묘비에 글자가 채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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