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년 오늘 완공된 ‘개선문’은 원래 보통명사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로마의 요란한 개선행진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개선문으로 남기도 해서 로마에만도 60개의 개선문이 있다. 로마 이전의 이집트에서도 처절한 전쟁과 화려한 개선이 있었음은 가극 ‘아이다’의 ‘개선행진곡’이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개선문은 고유명사 같은 데가 있다. 그래서 소설가 레마르크는 자신의 작품 제목을 밑도 끝도 없이 ‘개선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레마르크가 독일 출신 작가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베를린에 있는 독일판 개선문인 브란덴부르그문을 떠올리는 이는 없다. 그가 말한 개선문은 파리에 있는 개선문들 가운데서도 ‘카르셀 개선문’이 아닌 ‘에투아르 개선문’이지만 그냥 ‘파리의 개선문’이자 바로‘개선문’이다.
문제는 개선문이 말처럼 밝고 화려하지 않은 점이다. 실은 ‘개선’이라는 동전도 뒤집어서 보면 ‘패전’이나 ‘패주’이니 이름 자체도 밝고 화려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로마의 개선행진도 국민들에게는 통치자의 위세를 보이고 포로들에게는 굴욕을 주기 위한 것이니 멋지기보다는 숨막히는 그림이다.
개선문의 어두움은 그런 것만도 아니다. 겉으로는 하나 같이 화려하나 그 이면에는 역사의 어두움과 굴욕이 서려 있다. 바로 파리의 개선문이 그렇다.
이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5년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이긴 것을 기념해 이듬해부터 짓기 시작했으나 5년 뒤 건축가 샬그랭이 죽은 데다 곧 나폴레옹이 몰락해 그는 개선문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쓸쓸히 죽은 그의 유해만이 이 문으로 ‘개선’했으나 더 참담한 개선행진도 있었다. 1871년의 보불전쟁과 1940년의 2차 대전으로 독일군이 이 문으로 개선한 것이 그렇다.
그러나 개선문의 진짜 비극은 누가 그 문을 통과했느냐는 것이 아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바로 독일군이 그 문으로 개선하기 전에 끝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개선문은 가장 참담한 모습이었다. 개선문 부근에서 불안한 삶을 영위하던 망명가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순간 그 문은 어둠 속에 가리어 보이지도 않았으나 그래서 더 참담했다.
그것은 레마르크가 말하는 파리의 개선문만도 아니다. 바로 그 문으로 독일군이 개선한 지 몇 년 뒤에는 베를린의 브란덴부르그문으로 연합군이 개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그 개선문은 패전문보다 쓰라린 ‘분단문’으로 닫혀 있었다.
파리의 개선문이 완공된 지 60년 뒤인 1896년 이를 축소 재생산하듯 지은 ‘독립문’도 1982년 김일성의 개선(1945년 10월 14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평양의 개선문에서도 진실은 아득하거나 뒤틀려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이라크전쟁을 앞두고 파리와 베를린의 개선문 주위에서 ‘개선’과는 반의어인 ‘반전’의 시위가 열린 것은 반가웠다. 역사가 지금까지 ‘개선문’이라는 허상이나 세우던 어두운 밀레니엄들을 지나 보다 평화로운 시대로 개선하는 듯 해서다.
물론 그것은 성급한 기대일 수 있다. 바로 그 시위 자체가 말해주듯 최근에도 전쟁은 있었고 개선군과 ‘개선 대통령’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인류의 ‘개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따라서 그런 개선은 없는 것이 더 나았다. 그래도 그것을 기념하는 새 개선문이 들어서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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