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오늘 국내 첫 연극전용의 동양극장이 개장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공연되기 시작한다. 그 달 31일까지 계속된 이 연극은 ‘사랑에 속고’라는 작품이름보다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주제곡으로 더 대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6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내던져졌던 기생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으나 유독 홍도는 계속 울고 있다. 요즘 들어 홍도의 오빠 철수가 ‘홍도야 울지 마라’고 외치는 소리가 전에 없이 높은 것이 그렇다.
1995년 동양극장 개장 60주년 기념으로 이 신파극이 공연된 이후 여러 극단들이 이 극을 공연하는가 하면 한국적인 노래를 부르는 가수 치고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부르지 않은 가수가 드물 정도다. 그런 신파극 붐을 타고 MBC는 98년 ‘불효자는 웁니다’를 시작으로 ‘며느리 설음’(99) ‘아버님전 상서’(2000) ‘애수의 소야곡’(2001) ‘모정의 세월’(2002) 등을 매년 내놓고 있다.
동양극장의 개장과 이를 기념한 ‘사랑에 속고…’가 최대의 관객을 동원한 것은 한국 연극사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신파극이나 연극이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23년 도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토월회는 서양의 번역극들을 공연했고 신파극은 그보다도 역사가 오래다. 19세기까지 가부키(歌舞伎) 일변도의 일본에 서양의 멜로드라마가 도입되자 그것은 구파극(가부키)과 구분되는 신파극으로 불리었고 곧 일제침략을 따라 한국에 진출한다.
그래서 개화기의 신파극은 소재나 배우들의 옷차림까지 일본 신파극 그대로였던 것이 점차 한국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토월회에 참가했던 연극인들도 너무 서구적인 번역극으로 대중성과 상업성을 얻지 못하자 신파극에 눈을 돌리게 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실은 그 무렵 만주의 독립군 해방구에서 공연됐다던 ‘꽃 파는 처녀’도 붉은 색조를 띠었을 뿐 영락없는 신파극이다.
‘사랑에 속고’의 연출을 맡은 박진도 토월회 출신이었다. 그에게 무명 배우이자 극작가인 임선규(林宣奎)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대본을 내놓자 그는 “내가 싫어하는 신파곡이 다 들어 있네”하며 팽개쳤으나 극장 사장 홍순언은 대본을 보더니 공연하자고 했다. 이에 박진은 심술이 나서 제목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고 뜯어고쳤으나 그것이 거꾸로 히트를 했으니 너무 극적이었다.
그 덕에 임선규가 이듬해 명배우 문예봉(文藝峰)과 결혼을 한 것도 극적이나 그 뒤 그들이 겪은 곡절은 더 극적이었다. ‘사랑에 속고’에 힘입어 임선규의 작품들이 계속 히트하자 일본 고등경찰이 그의 사상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임선규는 일제 말기에는 너무 친일로 돌았다가 해방을 맞자 그 반작용으로 남로당에 앞장서 가입했다가 48년에는 아내 문예봉과 함께 월북하는 수순을 밟는다.
임선규는 민족주의 정서를 심으려 했다기 보다는 변환기를 맞은 우리 사회의 배금주의와 가족관계를 썼던 것이나 그것이 아직도 우리 대중의 정서와 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홍도야 울지 마라’는 유치하다 못해 답답하면서도 막상 흠잡을 데는 없다. “홍도야 울지 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리면/ 즐겁게 웃는 날이 찾아오리라”는 3절 가사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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