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오늘 단국대 교수 무하마드 깐수가 레바논계 필리핀인이 아니라 북한 태생의 위장간첩 정수일(鄭守一)로 확인됨으로써 국민들은 또 한번 놀란다. 84년 입국해 단국대에서 박사과정을 거쳐 88년부터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7월 초 북한인 간첩으로 체포됐으나 사람들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날 정권이 필요하면 대규모 간첩사건을 발표했고 그런 과정에서 인혁당 사건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도매금으로 희생되기도 해서만은 아니다. 한국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 행세는 할 수 있어도 중동인으로 가장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이날 다시 본 깐수는 원래 까무잡잡한 얼굴과 오뚝한 코에다 콧수염을 길렀으나 어쩔 수 없는 한민족이었다.
정수일에게 그것은 하나의 ‘귀향’이었다. 그것도 ‘2차 귀향’으로써 극작가 유진 오닐이라면 ‘먼 귀향’(Long Voyage Home) 이라고 했을 것이다.
34년 만주의 옌지 태생으로 중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인 베이징대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수일은 중국 국비장학생 1호로 이집트 모로코 등지에 유학한 뒤 현지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동서교역사와 실크로드를 연구했으나 북한으로 간 것은 그의 1차 귀향인 셈이다.
그가 잘 나가던 중국 외교관 생활을 그만두고 처자식을 데리고 북한으로 간 것을 두고는 중국 특유의 민족차별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데가 있다. 그는 훗날 소설가 황석영에게 자신이 ‘분단시대의 소명에 따른 한 민족적 지성인‘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런 조국의 소명이 들리지 않는 체질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북한에 가서 처음에는 아랍어과 교수나 김일성 통역 등을 맡던 그가 74년부터 간첩교육을 받고 레바논으로 가서 유럽에 거주하는 무하마드 깐수라는 실존인물의 명의로 국적을 취득한 뒤 튀니지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을 거쳐 한국에 잠입한 것도 물론 나름의 소명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에 처자를 둔 그가 88년 한국서 결혼을 하면서 “이제 한국인이 됐다”고 한 것이나 막상 정체가 밝혀져 체포되자 자신이 북조선 국적이라고 주장한 것도 나름의 소명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외국인 신분이었기에 처음 끌려간 곳은 출입국과 관세법 위반자를 수감하던 곳이었고 따라서 국외추방 등 가벼운 형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는 사형을 구형 당하는 등 어려운 길을 걸었다.
하지만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그는 지난 5월 한국국적을 취득함으로써 중국-북한 -레바논-필리핀을 거치며 계속 국적을 세탁해오던 그의 멀고 먼 항해는 끝났다. 정수일이 황석영에게 “분단시대의 지식인은 수의환향(囚衣還鄕)이 본분‘이라고 한 그대로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비슷한 데가 있다. 황석영은 정수일처럼 만주에서 태어나 남한에서 살다 북한에 갔던 죄로 오는 즉시 수갑을 찼으니 수의환향을 한 셈이다.
다만 가족이 분단돼 있는 정수일의 수의환향은 교도소를 나오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안고 가야하는 분단시대 지식인의 십자가다. 그럼에도 그가 뉴 밀레니엄의 해에 석방된 것은 지난날 이수근의 일이 떠올라 보기에 좋았다 . 일찍이 북한을 탈출했으나 남한에도 회의를 느껴 탈출하다가 붙들린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라 ‘광장’의 주인공인 ‘이명준’에 가까운 존재였으나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그는 사형수의를 입고 ‘귀향'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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