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오늘 새벽 0시 30분 홍콩의 무술영화 배우 이소룡(李小龍)이 죽었다는 발표는 뉴스라기보다 영화 같았다. 그 무렵 이소룡이 출연해서 끝을 맺지 못한 채 죽은 영화의 제목이 ‘사망유희’(死亡遊戱)여서만은 아니다.
그 영화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완성될 수 없었으나 영화사가 무리수를 써서 ‘완성’시킨 것이나 이를 두고 중국이 죽은 예술인을 모독한 것이라고 비난한 것도 영화 같다. 영화사로서는 망인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의 마지막 필름을 그대로 버릴 수는 더욱 없었던 것도 ‘소룡' 아닌 '거룡’ 배우에게서나 볼 수 있는 뒷 이야기다.
이소룡이 20일 밤 11시 30분에 죽고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 서두르듯 사망이 발표된 과정과 그 배경을 둘러싼 이야기는 더 영화 같았다. 그가 타이완의 여배우 페티 텡페이의 집에서 자다 위독해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옮겼으나 때가 늦어 숨진 것은 보통 배우라면 가벼운 이야기로 끝날 수 있었다.‘복상사’라는 소문이 나돌아 장례식장 한 구석에서도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잊혀지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이소룡의 팬들에게 그는 복상사로 죽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불사신이었다. 그보다는 영화 속에서 그가 넘나들던 수많은 죽음의 고비가 생생히 떠오르면서 타살설이 나돌았고 그것도 여러 갈래였다. 무술영화에서 흔히 보는 무림간의 패권싸움이라는 설에서부터 무림들과 홍콩 암흑가 사이의 알력이라는 설 등.
그래서 이소룡의 사인을 두고는 심장마비, 마리화나 쇼크, 진정제인 에콰제직 중독, 에콰제직이 목에 걸린 질식, 뇌종양, 독살, 무술시합 상처의 후유증, 복상사 등 8가지 사인이 나돌았으나 무림계가 그를 벌을 주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이소룡이 스스로 개발해 ‘정무문’(精武門)에서 보여준 절권(截拳)이 중국의 전통무술에서 이탈한 것인데다 그가 바로 전 해 자신에게 영춘권(詠春拳)을 가르쳐준 사부 엽문(葉問)의 장례에 참가하지 않아 중국의 전통무술계가 그에게 분개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소룡의 사인을 둘러싸고 전세계 의학계가 떠들썩 하자 홍콩 당국은 죽은 지 3일 뒤에 검시를 하고도 9월에 다시 검시재판을 해야 했으나 죽음을 둘러싼 파문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 판결은 “자살도 타살도 아닌 자연사”라는 어정쩡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소룡이 죽은 뒤에 벌어지는 ‘장외 영화’는 무술영화라기보다 사건의 진상을 끝내 밝히지 않은 채 막이 내리는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명화 ‘라쇼몽’(羅生門)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30년이 지나고 10년 전에는 그의 아들 이국호(브랜든 리)가 역시 촬영중 사고사를 당해도 영화팬들이 그의 사인을 궁금해 하는 것은 그것이 유난히 비밀에 싸여서는 아니다. 영화에서 비친 그의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다.
‘브루스 리’라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홍콩과 미국을 오가던 그는 중국 무술 덕에 영화배우로 성장하면서 전세계에 중국무술과 중국무술 영화를 전파했으나 그 과정은 너무 평화로웠기에 그는 아직도 사랑을 받고 있다.
네델란드의 축구팀 에인트호벤에 진출한 이영표의 모습이 이소룡 같다며 동료들이 ‘브루스 리’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적인 이소룡 사랑의 극히 일부로 볼 수 있다. 그가 떠들썩하게 죽어간 뒤에 태어난 세대에게도, 그리고 카리스마의 이소룡과는 달리 애교의 성룡을 좋아하는 세대들에게도 그는 영원한 ‘무술’의 대명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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