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오늘 뉴욕 양키즈의 조 디마지오는 56게임 연속 안타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다음날 그 기록은 멈추나 그는 또 다른 ‘기록’을 세운다. 다음날 클리블랜드와의 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하지 못한 채 8회 초 1사 만루에서 타석에 선 그는 병살타로 물러나게 되자 아무런 표정도 없이 글로브를 들고 외야수비를 하러 달려감으로써 ‘그라운드의 신사’라는 호칭을 얻는다.
그것은 얼핏 병살타로 역적이 된 선수가 도망치는 듯 한 모습이었으나 팬들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해 5월 15일부터 안타를 때리기 시작해 7월 2일에는 45경기 연속안타로 1897년 윌리 킬러가 세운 기록(44)을 깬 뒤에도 계속 안타행진을 이어가던 디마지오가 한번도 우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여러 차례 안타를 치지 못한 채 마지막 타석에 몰려도 결코 번트로 기록을 연장하려 한 적이 없었던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기록은 타이밍도 좋았다. 유럽에서는 이미 2차대전이 터졌고 미국에서도 진주만 기습이 5개월도 남지 않은 음울한 시기에 모처럼의 밝은 화제였다. “디마지오가 오늘도 안타를 치려나?” “치겠지” “오늘은 어찌 안될 것 같은데” “설마”…. 따라서 디마지오의 기록을 멈추게 하는 데 수훈을 세운 세 야수의 사진을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보는 시민들은 스타가 아닌 지명 수배자를 보는 듯 한 표정이었고 그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다.
디마지오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51년 야구선수로써 은퇴하면서 새로운 기록에 도전한다. 마릴린 먼로와 친해져 54년에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야구 스타와 영화 스타 커플이 생겨난 것이다. 디마지오가 영화를 모르고 먼로가 야구를 모르는 수준도 기록적이었다. 디마지오는 어느 광고에 후배 야구선수와 함께 나온 먼로를 ‘처음’으로 보고 반해서 구애했고 먼로는 함께 데이트하던 디마지오에게 사람들이 굽신거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먼로가 영화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디마지오가 모른 것은 비극이었다. 그가 먼로의 연기 생활이 때로 못마땅해 '전업 주부‘를 권장한 것은 시칠리아의 어부 아들로 소박하고 보수적인 그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나 영화배우를 아는 사람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혼은 처음부터 삐걱거려 일본 신혼여행은 고별여행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 여행에서 먼로만 한국을 방문한 것도 그런 것이다. 둘은 9개월만에 헤어졌고 그 뒤 먼로는 또 한번의 결혼과 케네디 형제들과의 방황을 겪다가 다시 디마지오와 만나려던 순간 의문의 죽음으로 사라지나 ‘보수적이고 답답한 디마지오’는 그를 떠나지 않는다.
먼로와 헤어진 그가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앞에서는 프랑크 시나트라나 케네디 등 아내의 몰락을 초래한 자들은 물론 아내와는 무관한 바람둥이인 클린턴의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디마지오가 95년 한 자리에서 클린턴이 악수를 청해도 받지 않은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대통령의 손을 잡는 대신 장미를 사들고 자주 먼로의 무덤을 찾더니 99년 암으로 눈을 감게 되자 먼로를 만나게 됐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가 간 이듬해엔 한국의 유명한 야구선수와 배우가 결혼을 하나 그 뒷소식은 음울하다. 두 사람이 디마지오-먼로 커플처럼 일찍 파경을 겪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점이라면 아이가 둘이나 있는 그들은 더 나은 편이다. 다만 헤어진 이후 장미꽃보다는 법정을 자주 찾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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